왕인 유적은 도선국사 유적?…11월 '왕인의 달' 맞아 논쟁 재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문화체육부가 선정한 이달의 문화인물 왕인 (王仁) 박사의 기념행사가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 가운데 그의 출생지로 알려진 전남영암 (靈巖)에서는 "도선 (道詵) 국사의 탄생지를 왕인의 탄생지로 바꿔놓았다" 는 논쟁이 재연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지난 81년 시작된 이 논쟁은 왕인박사 유적지 정화사업이 끝난 87년 이후 수구러드는 듯 싶었으나, 96년 도선국사 역시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기념행사를 펼치면서 불씨가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때 논쟁 또한 시원한 결말을 내리지 못했고 이달 들어 왕인이 문화인물로 선정돼자 재론하게 됐다.

영암문화원 (원장 김희규) 이 18~19일 주최하는 '11월 문화인물 왕인기념세미나' 가 그것. 먼저 왕인과 도선국사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왕인은 정확한 생몰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개 4~5세기경 백제인으로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해줘 고대일본문화의 개화에 기여한 인물로 추정된다.

일본측 사료인 고사기 (古事記) 와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의해 국내에 알려졌다.

도선 (827~898) 은 한국풍수의 시조로 불리는 신라말기의 선승으로 그와 관련된 숱한 전설로 인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 논쟁은 약 4백년의 차이를 두고 두 인물이 같은 지역에서 출생했지만 성기동 유적은 왕인의 것이라는 설 (학계와 일부주민의 주장) 과 이 지역의 전설에는 왕인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오직 도선국사의 탄생설만이 있다는 다수 주민들의 주장이 서로 어긋나는 데서 비롯됐다.

도선국사 탄생지라는 근거는 이렇다.

관찬 (官纂)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나 '영암 도갑사 사적' 등 불교관련 문헌자료와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도선은 월출산 아래 성기동에서 처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집안에선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이 아이를 숲에 내다버렸지만 비둘기와 학이 보호하는 것을 보고 다시 거둬 들여 키우니 그가 뒷날 도선국사가 됐다는 것. 도선이 버려졌던 바위를 국사암 (國師巖) 이라 하고, 비둘기가 보호했다 하여 이 일대를 구림 (鳩林) 이라 부른다.

이에 반해 학계와 일부 주민들이 왕인박사 탄생지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왕인의 전설 역시 이 지역에 일찍부터 있었고 성기동 (聖基洞 혹은 성짓골)에 암각으로 남아 있는 성천 (聖川) 이나 성천 (聖泉) 의 성 (聖) 자는 곧 왕인박사 같은 유학 (儒學) 의 성인이 이곳에서 태어났음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 또 월출산 도갑사 입구에 있는 문산재 (文山齋) 와 양사재 유적은 왕인의 수학처로 이 지역 유림 (儒林) 들이 그의 유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한 학당 (정확한 연대 未詳) 자리였다.

문산재 옆의 현존 석인상도 왕인을 기리기 위해 지방유림들이 세운 왕인상이다.

이밖에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배를 탔던 곳으로 전해지는 상대포가 구림에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지역 백암동의 백석 (白石) 은 그가 일본으로 '끌려갈 때' 남긴 유적이라는 전설도 전해온다는 것. 그러나 이같은 학계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지역주민들이 "왕인전설은 도선국사 전설을 인용해 날조된 것이라는 회의론" 을 계속 제기해 왔고 김철준 (작고. 서울대).최영희교수 (한림대) 등 일부학자들도 부정적 견해를 밝혔었다고 김정호관장 (영산호관광농업박물관) 은 이번 영암문화원 주최 세미나에서 발표할 논문에 밝히고 있다.

한편 주민들의 이같은 회의론에 대해 그간 왕인유적 발굴에 깊이 관여해온 정영호관장 (한국교원대학교박물관) 은 "도선국사에 대해서는 월출산과 관계가 있지 이 밑의 마을인 성기동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맞지 않고 도선국사의 전설이란 당나라로 떠날 때 상대포에서 떠났다는 전설뿐이지 그외에 관계되는 전설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월출산을 중심으로 해서 도선국사를 찾을 생각을 해야지 현재 기왕에 정립되어 있는 왕인의 전설을 도선국사 전설과 혼돈되어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고 한다 (문체부 발행 '11월의 문화인물 왕인' ) . 그렇다면 왜 지역주민들과 일부학자들의 왕인유적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왕인기념관이 세워졌을까. 대개 다음과 같이 추론하고 있다.

첫째 일부 저명학자들이 왕인의 성기동 탄생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둘째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두나라간 친선의 상징" 으로 왕인을 부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위 김정호의 글) .특히 일본인들 사이에 왕인의 기념물을 한국에 세우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 장소로 충남 부여와 영암이 경합했다.

이런 중에 성기동의 왕인유적 확인론은 영암에서 왕인기념사업을 펼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천여년 전의 두 인물에 대한 탄생지 논쟁은 우리 역사학계의 과제로 등장한 것이 분명하다.

이번 세미나에서 어떤 결론을 얻게 되든 불씨는 여전히 남을 것 같다.

주민 김찬모씨 (63) 는 말한다.

"역사에 대한 불신이 너무나 크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전설이 최근 몇년 사이에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장차 이 지역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도선국사 대신 왕인의 전설만을 믿게 됐다."

영암문화원 김희규원장은 보다 중립적이다.

"왕인현창회 (왕인유적사업 주관단체) 와 지역 주민 사이에 인식의 괴리가 있었다.

지역민 정서는 도선국사에게 더 밀착돼 있다.

도선국사기념관도 세우고 현창사업을 벌여 의견 차이를 해소해야 한다."

도갑사 주지 범각스님은 "도선국사기념관 설립도 시급하지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일" 이라고 강조한다.

영암 = 최영주 편집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