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대 9년 만학 졸업앞둔 조재형씨의 '환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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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방송대는 바닷가를 연상시킨다.

봄.가을 달라지는 학생들의 들락거림이 마치 밀물.썰물의 흐름 같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연초 약 20만명이 공부하던 터전에 지금은 14만명 가량 남았다.

이렇게 넘나드는 물결을 바라보는 건 상처에 소금물이 닿는 것만큼이나 아리다.

우리 사회의 대학 위상, 힘겨운 사람들의 배움의 열망, 그리고 현실이 교차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로 방송대 옆에서 '사진이야기' 라는 영상사진점을 운영하는 조재형 (37) 씨는 희망과 좌절, 성취와 포기가 뒤섞인 이 바닷가에서 9년을 머문 사람이다.

"이제 한 학기만 더 다니면 법학과를 졸업하게 된다" 고 자랑하는 그는 "우리 학교가 한국 최고의 대학" 이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던진다.

먼저 그의 얘기를 하자. 조씨의 과거는 소설과 영화.드라마를 섞어놓은 것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스스로는 "우리 학교엔 이런 사람 많다" 고 말하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다.

60년 전북 고창 태생인 그가 서울에 온건 중학교 중퇴 직후.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나 무릎을 다치고 동료의 손이 잘리는 것을 보며 공원으로 살아갈 용기를 잃었다.

다음번 직장은 을지로의 목욕탕이었다.

그는 손님 구두를 닦으며 틈틈이 때를 밀었는데, 이 둘은 일의 성격이 아주 비슷했다.

우선 곡선을 잘 타야 한다.

때밀이 수건에 살갗이 벗겨지는 것은 몸의 굴곡을 무시하고 밀었기 때문이며, 구두의 광이 불규칙한 것 역시 힘을 고루 주지 못한 까닭이다.

"저는 이 부문에 천부적 재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서울로 올 때의 결심은 이게 아니라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 그래서 찾아간 곳이 룸살롱이다.

웨이터로 일하며 세상구경도 좀 하고, 돈을 빨리 벌고 싶었다.

거긴 거미줄 같은 곳이었다.

아무리 빠져나오려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생활 리듬이 사회와 달랐고 돈도 둥둥 떠다녔다.

조씨는 7년만에 그 바닥을 겨우 벗어나 리어카를 끌었다.

속옷.과일.생선 행상등 안한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낮엔 운전기사로 일하고 밤엔 책을 읽었다.

87년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이란…. 택시회사에 취직해 영어단어집을 계기판에 올려놓고 틈틈이 공부를 했다.

당시 목표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패스하는 것. 그러나 노동운동을 하게 되면서 경로를 수정했다.

일단 빨리 노동법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89년 방송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방송대는 흑백필름 같던 그의 삶에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다.

택시기사로 일하랴, 노동운동 하랴 늘 쫓기듯 살았지만 대학 생활은 그를 따뜻하게 감쌌다.

"주변의 편견과 무시를 딛고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학우들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 영화패를 만들었다.

동아리 생활 속에서 새로운 의욕을 찾았고 92년 '새세대 영상기획실' 을 차렸다.

생업이 즐거운 건 처음이었다.

학우들과의 교류를 보람으로 살던 그는 93년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의욕이 뭉클뭉클 솟아났다.

우선 '공간 확보' 를 위해 뛰었다.

방송대생 모두의 소망은 바로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갖는 것이었기에. 원격강의.재택수업이 이 학교의 기본 개념이지만 혼자 하는 공부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이들에게 한데 어울려 토론하고 서로 격려하는 자리는 항상 절실하다.

"얼마전 부천에선 학습공간을 손수 꾸미던 학우가 벽돌에 깔려 사망했습니다.

관청에서 공간을 마련해 주자 돈을 아끼려 회사 휴가를 반납하고 직접 내부수리에 뛰어들었다 변을 당한 거죠. " 교수와 대면하는 시간도 늘리고자 애썼다.

스승과의 만남 없이 지식만 습득하는 건 대학생활의 의미를 반감시킬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것이 재정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에 뜻대로 진행되진 않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학우들의 생각을 모으는 것도 예상보단 어려웠다.

결국 임기를 조금 남기고 그는 물러났다.

추진하는 것들이 욕심만큼 진전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온 지금도 방송대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것과 학우들의 자부심을 높이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봅니다.

많이 나아지긴 했어도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아직 적지 않거든요. " 조씨는 다음달 한 청소년 단체가 마련한 인생강좌에 강사로 나선다.

"그들에게 방송대 입학을 강권할 요량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자기발전을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우리 학교가 훌륭한 길이 된다는 것을 꼭 알리고 싶습니다.

" 조씨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더없이 좋다.

원하는 일을 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갈망하던 학문을 익힌다.

처음 상경했을 때를 떠올리면 감회는 더하다.

"방송대가 아니었다면…. "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그러니 우리학교가 대한민국 최고죠. "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얼굴에선 솔직함이 흐른다.

"우리 사회가 밀물처럼 밀려온 사람들을 바닷가에 오래오래 머물 수 있도록 포용해줬으면 좋겠다" 는 게 그의 마지막 말.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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