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속에 담긴 '암호' 해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미술은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장르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미술은 사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담으면서 사람들의 시대별 사고방식과 사회구조를 은밀히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은 하나의 미디어로서도 구실해왔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서구의 주요 학문 흐름으로 자리잡은 문화연구 (Cultural Studies) 분야에서는 미술을 비롯한 각종 예술을 하나의 미디어로 간주하고 있으며 작품의 내용을 가지고 시대사를 연구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영화에 담긴 내용을 바탕으로 시대별 남녀관계.인종차별.계층갈등을 연구하는 것이 좋은 예다.

예술사의 입장에서 보면 시기별 작품 양식의 변화상이나 시대별 작가론 연구에다 작품에 담긴 시대사상을 읽는 방법론을 하나 더 추가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국내에서 미술작품을 읽어 거기에 담긴 시대와 사회를 파악하는 방법론을 적용한 두권의 연구서적이 나란히 발간돼 관심을 끌고 있다.

독일유학중인 미학연구가 진중권씨 (34)가 쓴 '춤추는 죽음' 1.2권 (세종서적刊) 과 독일 함부르크 대학 미술사 교수인 마르틴 바른케가 쓴 '정치적 풍경' (일빛刊) 이 그것이다.

'춤추는 죽음' 은 서양미술에 나타난 죽음의 이미지만 따로 모아 죽음에 대한 시대의 관념사를 탐구했고 '정치적 풍경' 은 미술에 나타난 풍경을 연구해 자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역사를 조명했다.

미술작품을 이용해 시대의 정신사를 읽는 방법론을 적용한 두 책은 미술이 강력한 미디어로서 기능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중권씨는 "현대 미술은 색채와 형태의 유희가 되어버렸지만 그 이전 몇천년간 그림은 무엇인가를 말하는 기호로 작용했다" 고 말했다.

그는 "그림은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그 기호는 별도로 읽는 법을 익혀야 한다" 고 밝히고 예술사에서는 도상학 (Ikonographie) 이라고 해서 그림 읽는 법을 따로 연구하는 학문이 있다고 소개했다.

특히 서양 중세의 그림 속에는 관습적인 기호체계가 항상 들어있다.

예로 그림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해 습관적으로 어떤 상투적인 도구를 덧붙이고 있다.

예로 석판을 들고 있으면 십계명을 받은 모세, 열쇠를 갖고 있으면 천국의 문지기인 베드로, 고문과 처형의 도구인 바퀴를 들고 있으면 순교성인인 성 카타리나라는 공식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기호학적으로 '도상학적 지표' 라고 하는데 진씨는 이 지표를 이용해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그림들을 분석해 미술작품과 함께 시대별로 변화해온 죽음의 관념사를 도출해내고 있다.

아울러 죽음의 역사학을 넘어서 죽음이 어떻게 표현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미학 분석도 함께 시도하고 있다.

'정치적 풍경' 은 풍경화나 인물화 속의 배경 풍경에 초점을 맞춰 그 자연풍경 속에 은유적으로 담겨있는 시대의 사상, 또는 정치적인 의미를 읽고 있다.

바른케 교수가 제시한 사례 중 대표적인 것으로 독일 레겐스부르크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프 (1480쯤~1538)가 1529년에 그린 '알렉산더의 이수스 전투' 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를 격파한 전투장면을 장대한 산.바다.하늘의 풍경과 함께 담은 것이다.

독일 풍경화의 창시자인 알트도르프는 기독교 성화나 역사화에 별빛.황혼.나무.산.구름 등 풍경을 잘 활용해 극적인 효과를 높인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저자는 그의 그림에서 이러한 미술사적 의미를 찾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찾아낸다.

밝게 표현된 알렉산더 군대와 어둡게 그려진 다리우스 군대의 명암 대비는 당시 사람이 생각하는 동방과 서방에 대한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파악했다.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무지와 적대감, 그리고 몽상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전통을 하나의 그림을 통해 밝힌 것이다.

미술품을 읽어 역사를 재구성한 이 두권의 책은 아직 미술품에 대한 미디어적.문화연구적 접근이 제대로 시도되지 않고있는 국내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는 "미디어적 측면에서 미술에 접근하는 방식은 앞으로 미술연구의 주요 흐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대중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호응이 예상된다" 고 내다봤다.

채인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