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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파악이 어두운 국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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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어지럽다. 천박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지도자.정치인.언론, 그리고 시민단체들 모두가 어설프고 얄팍하다.

좋게 말하자면 지나치게 역동적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그저 허둥댄다.

최근 사태에서 우리는 자신의 위상과 한계를 보고 있다. 김선일씨 피살을 통해 국가 시스템이 얼마나 엉성하게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김씨를 추모하는 한 초등학생 편지에 '우리나라가 그렇게 약한 줄 몰랐다'는 구절이 절절하다. 바로 그 메시지를 우리 모두 더 늦기 전에 생각해 봐야 한다. 이라크 파병이나 한.미동맹을 둘러싼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움직임 역시 몰려다니며 외쳐대기만 했지 논리가 차갑지 못하다. 세치 혀를 놀려 국민을 흔들어대긴 쉬울지 몰라도 행동이나 외침에 전략적 사고가 담겨있지 않다. 제발 바깥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라. 세계 속의 우리는 과연 어디에 서있는지. 또 닥친 도전을 감당할 지혜와 경제적 역량은 있는 지 정색하고 따져보자.

일본 자위대가 창설 50돌을 맞이한다. 국방비로 보면 세계 5위의 군사대국이다. 자위대의 행동반경 역시 일본열도를 벗어난 지 오래다. 우리가 일본에 따질 일들이 남아있다지만 자위대의 평화유지 활동을 보는 국제사회의 평가는 대부분 긍정적이다. 우리도 동티모르에서 유엔 깃발 아래 자위대와 함께 일했다. 그런 마당에 자위대 기념식에 초대받았던 (특정 정당의) 정치인이 언론에 '말의 테러'를 당하는 단세포 사회가 한국이다. 그래서 일본을 이해하고 전략을 얘기할 만한 전문가들은 입을 다문다. 감정이 앞서는 아메바들의 무분별한 '린치'에 시달리기 싫어서다.

일본 외무성이 유엔 상임이사국 지위 확보를 위해 조용히, 그리고 전략적으로 움직인지는 20년이 넘었다. 그러나 차기 유엔 사무총장 자리는 우리 몫이라며 말부터 앞세우는 게 우리 외교다. 한.미와 미.일 간의 반세기 넘는 동맹관계가 한반도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마당에 일부 신출내기 정치인은 중국에서 희망을 찾겠단다. 현실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미래를 들먹이는 버릇은 국민의 착각을 부추길 뿐이다. 그들이 과연 주변 강국의 힘과 그들 간의 역학관계를 짚어본 적이 있을까. 바깥에서 시민운동 하던 이들이 금배지 달고난 뒤엔 국회 안에서 농성을 벌이는 해괴함은 또 누가 말려야 한단 말인가.

김선일씨의 주검은 미군에 의해 발견됐고 미 군용기를 이용해 미군 비행장을 거쳐 우리 국적기에 실렸다. 미군 납품업체에서 일했고 죽음 앞에선 미국을 비난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를 살려내기 위해 우리 정부가 먼저 기댄 곳 역시 미국이었다. 한국전쟁에서 4만명 가까운 미국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우리 사관학교 입학생의 과반수가 한국전을 북침(北侵)이라고 믿는 게 비뚤어진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평양에게 서울은 이미 고려의 상대가 아니다. 이제 남은 건 워싱턴 공략이라고 자신한다. 우리 사회 돌아가는 꼴을 보면 내가 그들이라도 국가전략을 그렇게 짜겠다.

흥미롭게도 중국인들은 우리가 미국을 비난할 때 쉽게 끼어들지 않는다. 한국이 결국 미국을 버리고 자기들 편에 설 것이라 자신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상대가 미국이란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을 앞에 놓고 한국민의 정서가 미국을 떠나고 있다는 얘기를 늘어놓는 모습이란 정말 꼴불견이다. 자신이 어디쯤 서있는지, 눈 앞의 도전을 이겨낼 능력은 있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주제 파악에 어두운 국민은 어디에서도 무시당하게 마련이다. 이제 이런저런 푸닥거리는 그만하고 차분하게 주제 파악부터 시작하자.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