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자 김봉렬교수가 본 부석사·병산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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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건축가들에게 부석사 (浮石寺) 와 병산서원 (屛山書院) 은 영원한 텍스트다.

그곳에는 항상 새로운 감동과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건물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영주 부석사에는 정숙한 귀부인과 같은 완벽한 고전미의 무량수전이 있다.

하지만 국보 중의 국보로 칭송받는 무량수전이 아무리 아름답다하더라도, 부석사 전체를 이루고 있는 웅장한 석단 (石壇) 들의 집합적 구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물며 병산서원에는 이렇다고 내세울만한 건물이 없다.

평범하고 소박한 건물들이며, 주건물인 강당은 1930년대에 새로 지은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도 없다.

진정한 건축적 가치는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물과 건물이, 건물과 자연이 하나로 엮여지는 전체적인 질서 속에 있다.

우리는 건축물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다.

현대의 관광객이 아니라 당시 그 건축물을 사용했던 승려와 유학자의 상태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더 깊이 감상하려면 그 건축을 설계하고 시공했던 과거의 건축가로 돌아가면 된다.

부석사를 감상할 때, 무량수전을 향해서 끝없이 올라가기만 하는 것은 현재의 눈이고, 무량수전 기둥에 기대서서 뒤를 돌아보는 것은 과거의 승려들이 가졌던 눈의 위치다.

백두대간을 타고 전개되는 소백산맥의 웅장한 대자연에 감동할 것이다.

이 험난한 산중에 대석단을 쌓고 아름다운 건물을 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 곳의 주인인 부처가 이 광경을 음미하면서 불국토를 만들겠다는 염원이 만들어 놓은 결과이기도 하다.

병산서원의 주인은 원장선생이었다.

서원에 들어가면 강당의 대청마루 한 가운데 앉아보기를 권한다.

그 위치가 바로 원장이 앉아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역시 놀라운 광경을 볼 것이다.

절벽같이 둘러쳐진 앞 산과 유연하게 흐르는 낙동강이 한 눈에 들어 온다.

그러나 이때의 풍경은 자연 그대로가 아니다.

마당 앞을 길게 막고 있는, 텅빈 7칸짜리 누각 건물을 통해 들어오는 인공화된 풍경이다.

누각은 앞산을 세로로 쪼개 7폭 병풍으로 만들고, 지붕과 마루 사이에 낙동강의 흐름만이 걸리도록 꼭 그만큼의 높이와 꼭 그곳의 위치에 세워졌다.

부석사와 병산서원은 비록 작은 건축군에 불과하지만, 대자연을 끌어들여 건축적인 요소로 활용하려는 예지가 가득한 곳이고, 그 의도는 성공적으로 실현됐다.

만약 두 건축물을 계획했던 건축가들이 현재의 서울에서 활동했다면, 서울이라는 인공적인 도시 전체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이른바 컨텍스트에 충실한 건축을 선보였을 것이다.

그런 정신과 기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사찰은 불교건축이고 서원은 유교와 성리학의 건축이다.

종교적 건축들은 종교적인 신념 속에서 세워졌고, 교리와 종교적 의례를 충실히 수행하려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다.

부석사의 건축가들은 의상대사의 제자들이다.

그들은 화엄학이라는 거대한 우주관 속에서, 당시 민중들을 사로잡았던 극락정토신앙을 건축의 모티브로 삼았다.

소백산맥의 자연을 감싸 안으며 화엄의 불국토를 만들려했고, 급한 경사지를 9개의 석단으로 나눔으로써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구현하려 했다.

병산서원은 퇴계학파의 적자, 유성룡의 제자들이 세운 서원이다.

그들은 청빈과 관용을 이상으로 삼은 초기의 건강한 성리학자들이었다.

성리학의 근본인 규범과 질서에 따라 뼈대를 세웠지만, 다른 형식적인 서원과는 달리 부분들을 변화시킴으로써 역동적이고 다양한 공간을 이루어냈다.

생각없는 건축시대에 부석사와 병산서원은 정신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건축을 만들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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