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영화]왕자웨이 감독 '타락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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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90년대 한국영화시장에서 왕자웨이 (王家衛) 감독의 지위는 특이하다.

그는 배우가 아닌 감독 이름만으로 작품을 선택케하는 몇 안되는 '스타' 감독중의 한 명에 속한다.

한국의 젊은 관객들이 선호하는 '베스트 원' 이자 영화학도들의 졸업작품중 열에 아홉은 그의 스타일을 어떻게든 따라보고자 하는 작품들이라는게 영화학과 교수들의 전언이다.

심지어 충무로의 기성 감독들 가운데서도 줏대없이 그의 작품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경향마저 있다.

오죽하면 왕감독이 "이러다가 내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 며 자기영화의 무분별한 모방을 빈정댔겠는가.

확실히 그의 영화에는 세기말의 젊은 관객들을 매혹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 영화에는 '타락' 한 도시의 병든 '천사' 다섯이 등장한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독한 킬러 리밍 (黎明) .리밍에게 살인청부업을 알선해 주면서 그와 사랑에 빠지는 리자신 (李嘉欣) .어릴 때 유효기간이 지난 통조림 ( '중경삼림' 에 대한 유머다!

) 을 먹고 실어증에 걸린 사나이 진청우 (金城武) .그는 홀아버지를 모시면서 남의 가게에 숨어 들어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장사를 한다.

어느날 그는 실연의 상처로 고통받는 양차이니 (楊采泥) 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혼자만의 밤을 두려워하는, 머리에 물을 들인 모원웨이 (莫文衛) .그녀는 리밍과 짧은 사랑을 맺는다.

영화는 리밍과 진청우라는 인물을 두 축으로 해서 별개로 진행되다가 결말에 가서 합쳐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타락천사' 는 '동사서독' 을 만드는 중간에 여기 (餘技) 로 제작했다는 '중경삼림' 에 비해 보다 세심하게 화면을 다듬은 기색이 역력하다.

불연속적인 시간과 인간관계의 단절감이 단짝인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술에 의해 영화 전편을 지배한다.

번잡하면서도 왠지 쇠락한 듯한 분위기의 홍콩 밤거리 풍경이 주인공들의 흐느적거리는 몸짓과 어울려 애잔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영기 기자

타락천사墮落天使KBS2 밤10시10분

감독 : 왕자웨이 주연 :리밍.리자신.진청우 연도 :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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