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가만히 앉아서 빚더미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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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올해 경상이익은 4천억원 정도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환율 폭등 때문에 환차손만 1천7백억원이 예상돼 절반 가까이를 앉아서 까먹어야 할 형편입니다. "

㈜SK (옛 유공) 관계자는 "장사를 아무리 잘해도 환율이라는 '기업 입장에선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때문에 이익의 상당부분을 잠식당하고 있다" 고 푸념했다.

요즘 재계 실정으로 보면 이 정도는 그리 놀랄 일이 못된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엄청난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비행기 도입과 관련해 아시아나항공은 24억달러, 대한항공은 40억달러가 넘는 외화 빚을 안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말 달러당 8백44원이던 원화 환율이 1백원 이상 올라 이젠 '1달러 = 1천원' 고지에 육박하고 있다.

각각 수천억원대의 환차손을 보게 된 셈이다.

게다가 올해는 영업쪽에서도 큰 흑자를 내기 어려워 올 결산때는 막대한 환차손이 그대로 적자로 연결될 전망이다.

기업이 적자를 내거나 자본을 잠식당하면 은행이나 투자자 등 전주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기업들의 고민도 바로 이 점에 있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수많은 대기업들이 대규모 적자 또는 자본 잠식업체로 기록될까봐 결산서 작성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 이라고 말했다.

날개없이 떨어지는 주가도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30일 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다음달 유상증자 규모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42.4% 줄어든 1천7백87억원에 그칠 것으로 추정됐다.

주가가 급락하니 주식을 비싸게 발행할 수가 없고 설령 발행한다 해도 사려는 투자자가 많지 않아 증자를 통한 자금조달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 된 것. 전경련 관계자는 "주가.환율 불안으로 가장 큰 손실 가운데 하나는 대외 신용도 하락" 이라며 "최근엔 외국돈을 빌리는 것이 어려운 정도가 아닌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 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선 요즘 "10대 그룹에 드는 업체까지 사채를 빌려 쓰고 있다" 는 소문도 나오고 있다.

29일 30대 그룹 기조실장 회의때는 "암 걸린 사람에게 술.담배 끊으라는 식" 이라는 등 최근 정부 시책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도 있었다.

'총체적 난국' .재계가 요즘 경제상황의 심각성을 대변한 말이다.

민병관 <경제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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