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어느 자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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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춘추시대의 강국 진 (晋) 나라는 기원전 7세기를 지내는 동안 공실 (公室) 이 약해져 강성한 여섯 신하의 집안 사이에 각축장이 됐다.

그중 지 (智) 씨가 범 (范) 씨와 중행 (中行) 씨를 먼저 병탄하고 이어 조양자 (趙襄子) 를 공격하다가 조 (趙) 씨, 한 (韓) 씨와 위 (魏) 씨의 협공으로 멸망했다.

예양 (豫讓) 이란 선비는 처음 范씨와 中行씨를 섬기다가 나중에 智씨를 섬기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주군 지백 (智伯) 이 죽자 그는 조양자를 암살해 원수를 갚기로 스스로 다짐한다.

그는 칼을 품고 천한 일꾼으로 가장해 조양자에게 접근했으나 발각돼 붙잡혔다.

조양자는 예양이 천하의 의인 (義人) 이라며 그를 죽이려 하는 부하들을 말리고 풀어주게 했다.

그러나 복수의 뜻을 버리지 않은 예양은 이번에는 문둥이 거지로 모습을 바꾸고 다시 기회를 노렸다.

조양자의 부하로 들어가면 기회 얻기가 더 쉽지 않겠느냐고 한 친구가 권하니 예양은 단호히 거절한다.

두 마음을 품고 거짓 충성을 바치는 짓은 복수의 뜻을 오히려 더럽힌다는 것이었다.

다시 발각돼 포위된 예양에게 조양자가 물었다.

"네가 원래 섬기던 范씨와 中行씨가 지백에게 죽었음에도 그들의 원수는 갚으려 하지 않고 유독 지백만을 위해 복수하려는 까닭이 무엇인가.

" 예양은 대답했다.

"范씨와 中行씨는 저를 하찮은 사람으로 대했기에 저도 하찮은 사람으로서 그분들을 대하지만 지백은 저를 큰 선비로 대했으니 저도 큰 선비답게 그분을 대하는 것입니다.

" 그러고는마지막 소원이라며 복수의 시늉이라도 하도록 조양자가 입고 있던 저고리를 내달라고 청했다.

조양자가 허락하자 세 번 뛰어 저고리에 칼질하며 "지백의 원수를 갚는다!" 외치고는 칼 위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선비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며 지백의 지은 (知恩)에 목숨을 건 예양이 복수의 대상 조양자에게 새로 지은을 입었으니 상충되는 은혜 속에 비극적 결말은 정해졌던 셈이다.

한편 조양자로서도 예양을 아끼는 마음이 예양의 죽음을 어쩔 수 없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예양처럼 의리에 목숨 바치기를 오늘의 정치인들에게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치생명을 걸고' 저격수를 자임하다가 하루아침에 총구를 1백80도 돌리는 모습은 옛날 자객과 너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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