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생활36년' 프랑스 현대작가선 오른 방혜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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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내 잔잔한 마음의 호수에 돌을 던져라!”

61년 3월. 마치 이 세상을 다 삼켜버리고 말겠다는 듯한 비장한 마음을 신문에 이렇게 한줄 적어놓고 방혜자는 혼자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미대 시절 친구들에 교수들까지 김포공항에 죽 늘어서서 입을 꼭 다문 채 '증명사진' 도 한장 박았다.

돌아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왜 그리 심각했는지. “무슨 빛에 이끌리듯” 시작했다는 방혜자 (60) 씨의 낯선 파리 생활은 벌써 40년이 되어간다.

그 세월은 의욕만 넘치던 긴 생머리의 동양 아가씨를 원숙한 한 사람의 프랑스 작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 40년의 결실을 한권의 책에 담아 내놓았다.

쪽빛 가을하늘에서 뿜어져나온 투명한 빛이 고개숙인 벼가 출렁이는 황금들녁을 비추고 있는듯한 방씨의 작품 '천지' 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두툼한 하드커버의 화집이다.

마음 내키는대로 그냥 작품 몇개 묶어서 펴낸 그렇고 그런 도록이 아니다.

작가 선정에 있어 까다롭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명문 미술전문출판사 세르클 다르의 현대작가선에 이제야 비로소 방혜자라는 이름을 올린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이 출판사에서 책을 낸 것만으로도 작가로서 인정받고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권위가 있다고 한다.

프란시스 베이컨과 게오르그 바젤리츠.페르난도 보테로.엔초 쿠치.후앙 미로.피카소.안토니 타피에스…. 쟁쟁한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모두 포함돼있는 이 출판사의 현대작가선 명단을 보면 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만드는데 꼬박 3년이 걸렸다.

출판사가 먼저 작품 선택이나 색분해등에서 까다롭게 굴기도 했지만, “그리는 행위 자체가 삶” 이라는 방씨의 말처럼 작품들을 정리하는 과정은 곧 그의 일생을 돌아보는 것과 같아 어느 것 하나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 작품뿐 아니라 도록 마지막 부분의 연보에 쓸 사진을 고르기 위해 옛사진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들추어보기도 했다.

작품세계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 앞만 바라보면서 살아왔던 그에게 이처럼 과거를 바라보아야 하는 책 만드는 과정은 괴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방씨는 “과거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마치 벌거벗고 있는듯한 부끄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미래를 위한 '기분 좋은 자극' 이 됐다” 고 털어놓는다.

지금까지는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두가지 문화의 기로에 서서 우리 전통에 대한 성찰을 '빛' 으로 담아낸 작업을 해왔지만 이 책을 계기로 '보편성' 을 말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작품세계로 나아갈 자신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출간에 맞춰 갤러리현대에서는 11월5일까지 방씨의 개인전을 열고 있다.

3년만에 갖는 이번 서울 전시에서는 그의 인생의 냄새가 그대로 배어나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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