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고바야시 '삼성화재배' 놓고 격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한국의 이창호9단과 일본의 고바야시 사토루 (小林覺) 9단이 우승상금 3억원의 '삼성화재배' 를 놓고 결승전을 시작한다.

97년도 세계바둑계의 대미를 작성할 이번 5번승부의 첫판은 오는 31일 제주도 서귀포 중문단지내 신라호텔에서 개막된다.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한-일전이 됐다.

중앙일보와 KBS.유니텔의 공동주최로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선수권대회가 처음 창설된 지난해엔 한국의 유창혁9단과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 (依田紀基) 9단이 결승에서 맞붙어 요다9단이 우승컵을 가져가버렸다.

이번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최강의 실력자 이창호9단이 최후까지 살아남아 우승컵을 탈환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상대 고바야시9단은 전투에 능하고 대세감각이 좋은 대신 뒷심이 약하다.

뒤로 갈수록 강해지는 李9단과는 대조적인 기풍이지만 두텁다는 점에선 서로 상통한다.

李9단은 지금까지 세계대회에서 여덟번이나 우승해 가장 많은 우승횟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비해 고바야시9단은 아직 우승자 명단에 등록조차 못하고 있으니 李9단의 전력이 앞선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95년 일본에서 기성위를 쟁취하며 1인자에 올랐던 고바야시는 올해 국제무대에서 상승세를 보이며 동양증권배에 이어 두번째 결승전에 진출하고 있다) . 두사람간의 개인 대결에서도 李9단은 고바야시에게 4승1패를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이창호란 사람은 체질적으로 장기전에 능해 5번기로 펼쳐지는 세계대회 결승전에선 한번도 진 일이 없다.

그래서 프로든 아마추어든 만나는 바둑계 인사들은 누구나 이창호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李9단에게도 한가지 징크스가 있다.

이창호는 최고지만 최고타이틀은 지금까지 이창호의 품안에 쉽게 들어온 적이 없다.

국내기전의 예를 들어보자. 李9단은 92년부터 95년까지 당시 국내최대의 왕위전에서 타이틀 쟁취에 연속 실패했다. 다른 기전을 싹쓸이한 상황에서 왕위전만 따내면 '천하통일' 을 이룰 수 있었으나 유창혁9단의 완강한 방어에 막혀 끝내 실패했다.

96년에야 비로소 타이틀을 따냈으나 그때는 이미 천하통일이 물건너간 뒤였다.

국제기전에서도 이같은 상황은 비슷하게 재연되고 있다.

현재 세계최대기전은 4년마다 한번 열리는 應씨배 (우승상금 40만달러) 와 매년 열리는 삼성화재배를 꼽을 수 있는데 이 두개의 매머드 기전에서 세계최고수 이창호는 아직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應씨배는 지금까지 세번 열려 조훈현.서봉수.유창혁 순으로 우승했다) . 應씨배는 2년후에나 열린다.

李9단은 그래서 올해 제2회 삼성화재배를 반드시 차지하겠다고 결심했다.

본선이 시작되자 린하이펑 (林海峰) 9단과 위빈 (兪斌) 9단을 가볍게 꺾어 8강전까지는 순탄하게 진출했다.

하지만 8강전에서 일본의 히코사카 나오토 (彦坂直人) 9단에게 크게 고전하더니 준결승전의 마샤오춘 (馬曉春) 9단에겐 99% 진 바둑을 기적적으로 역전시켰다.

이창호의 기력과 특출한 인내력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드라마여서 팬들은 감동했으나 이창호 본인에겐 액땜치고는 너무 위태롭고 가혹한, 온몸이 탈진할 정도의 힘든 승부였다.

지옥구경을 하면서 李9단은 여기까지 왔다.

대신 상대 고바야시9단은 홍태선7단.저우허양 (周鶴洋.중국) 8단.이성재4단.김승준5단등 주로 한.중의 신예들을 상대하며 비교적 쉽게 결승까지 진출했다.

고바야시9단은 임전소감을 묻자 “언젠가 이창호9단과 5번승부로 겨뤄볼 수 있다면 하고 고대해왔다.

드디어 기회를 잡았으니 결코 물러설 수 없다” 고 대답했다.

이창호9단은 빙긋이 웃으며 “나 역시 오래 기다렸다” 고 말한다.

그러나 李9단이 기다린건 고바야시가 아니라 매머드 세계기전의 우승컵이다.

박치문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