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랑 보수랑] 4. 김호기 연세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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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사회에서 보수.중도.진보를 구분하는 기준은 서구 사회와 사뭇 다르다. 서구의 경우 정부와 시장, 성장과 분배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가 그 핵심 기준이라면, 우리의 경우에는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가 주요 기준이었다. 하지만 최근 기존의 이념구도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먼저 남북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영향력이 줄어든 반면 정부와 시장, 성장과 분배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 더불어 양성평등.생태보호 등 생활정치에서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구분이 갈수록 비중을 더하고 있다. 대체로 보수주의는 시장.성장.전통을 중시한다면 진보주의는 정부.분배.변화에 무게중심을 두며, 중도주의는 절충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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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화의 충격이다. 세계화는 민족주의에 맞서는 보편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기존 보수.중도.진보의 이념구도를 다시 양분해 왔다. 문제가 간단치 않은 것은 세계주의의 이중성이다. 그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와 지구적 민주주의를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서구 중심적인 가치와 미국 주도의 패권주의를 강조하기도 한다. 예컨대 시장 개방과 노동의 유연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동의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정답은 없는 셈이다.

우리 사회 주요 단체들을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념지도에 위치시켜 봤다. 가로축이 전통적인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구분에 따른 것이라면, 세로축은 새롭게 부상한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구분에 따른 것이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세계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는 중도주의가 위치해 있다.

이 이념구도가 함축하는 바는 두가지다. 첫째, 우리의 이념지도는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으로만 파악할 수 없다. 오늘날 이념지형은 여러 기준이 교차함으로써 복합구도로 나타나고 있다. 둘째, 이념 간의 생산적인 긴장이 요구된다. 다양성과 복합성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사회에서 이념적 왕도(王道)란 없다. 따라서 이념 간, 정책 간의 생산적인 토론과 경쟁이 더욱 활성화돼야 한다.

◇특별취재팀 = 이하경 논설위원, 김창호 학술전문위원, 이세정 논설위원, 전영기 정치부 차장,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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