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내일이 안보이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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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우리 사회는 하루는커녕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 잇따르고 상상도 못할 일들이 예사로 반복되고 있다.

한마디로 수라장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서로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고 묻는게 인사가 됐다.

불안.불신감이 이렇게 고조됐던 적이 과거에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사람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주역은 말할 것도 없이 정치인들이다.

여야 (與野) 없이 정의나 도의는 사라진지 오래다.

어제의 동지도 자신의 이익이나 입지와 어긋나면 하루 아침에 적이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을 입증이나 하려는듯 한솥밥 먹던 식구로서 최소한의 예의도 팽개친채 서로에게 칼끝을 들이댄다.

같은 당 간부들끼리 온갖 추태를 부리면서도 국민들에게는 표를 달라고 하고 있으니 후안무치 (厚顔無恥) 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의 허물에는 특별법.특검제를 부르짖던 야당이 자신의 의혹은 수사하면 안된다고 온갖 이유를 둘러대기 바쁘니 한심하기는 다를 바 없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상대방에게 관대하라는 옛 어른들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이중잣대를 가진 셈이다.

또 구정치를 청산하겠다는 사람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정말 꼴불견이다.

정당인으로서 당원들끼리의 약속도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이 국민과의 큰약속을 지키겠다고 큰소리 치는 것도 뻔뻔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정치인중에서 자녀를 향해 '나를 본받아라'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경제도 정치판을 닮아가는지 원칙도 상식도 없다.

심혈을 기울여 성실히 노력하다 몇천만원을 부도낸 영세기업주가 교도소로 가는 것은 당연하고 수천억원을 빚진 대기업주는 오히려 큰소리 치며 사는게 우리나라다.

소액을 부도낸 사람은 숨어 다니느라 더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지만 온 국민에게 피해를 준 사람은 '국민기업' 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정부나 채권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큰소리 치고 있지 않은가.

사회쪽도 목불인견 (目不忍見) 의 연속이다.

지금까지는 자녀들이 데모를 할라치면 부모들이 기겁을 하고 말리는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들은 오히려 가만히 있고 부모들이 가두시위를 예사로 벌이는 세상이다.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서울대의 입시 규정을 바꿔야 하고, 눈을 부릅뜨고 시험감독을 해서 남의 자식의 커닝을 잡아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내 딸.내 가족이 편하게 살기 위해 12세짜리 남의 딸에게 매춘을 강요하는게 지금의 우리 사회다.

정의의 파수꾼이란 검찰도 실망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이유야 어떻든 국민회의 김대중 (金大中) 총재 비자금 의혹 수사를 정치적 판단에 따라 유보한 것은 잘못이다.

검찰의 가장 큰 임무는 바로 수사가 아닌가.

법관이 판결로 말하듯 검찰은 수사 결과로 평가받아야 했다.

검찰이 수사 유보를 결정.발표하는 과정은 더욱 의혹을 증폭시킨다.

검찰총장이 수사 실무 책임자인 중앙수사부장을 제쳐놓고 새벽에 고교 후배인 수사기획관을 집으로 불러 발표 문안을 만든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정상이 아니다.

또 특정 사건에 대해 전례없이 검찰 총수가 직접 TV회견을 갖고 서둘러 발표한 것도 그 배경이 자못 궁금하다.

최근의 12.12및 5.17 쿠데타사건이나 全.盧 두 전직 대통령 비자금사건, 한보 비리, 김현철 (金賢哲) 수사 등도 모두 중수부장이나 서울검사장이 맡아 처리하지 않았는가.

법무장관.청와대 등에 대한 보고 여부.시간 등에 대해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설명이 서로 엇갈리는 것도 의혹이 아닐 수 없다.

사방을 둘러봐도 순리 (順理) 는 없고 있어서는 안될 일들 뿐이다.

가치관이 전도되고 원칙이나 기준도 없으며 최소한의 양심마저 마비상태다.

정말 이대로 다가오는 21세기를 맞고 다음 세대에게 이 모습을 그대로 물려줘도 괜찮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다.

권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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