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일본경제]올 '성장률 0%대' 빈사상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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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본경제가 비틀거리고 있다.

미국이 80개월 연속 경기확대라는 장기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경기후퇴를 우려할 정도로 깊은 침체의 골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경기회복을 위해 손을 써야할 단계가 벌써 지났음에도 일본 정부는 뾰족한 처방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기로에 선 일본경제의 모습과 그들이 처한 고민, 우리에 미칠 파장등을 진단해본다.

도쿄 (東京) 가부토쵸의 증권가는 요즘 오후4시만 되면 긴장감이 감돈다.

주식매매가 끝나는 이 무렵부터 도산기업들의 기자회견이 줄을 잇기 때문이다.

여름부터 증권가에 은밀히 나돌던 '건설업체.유통업체의 부도 도미노' 소문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올해 1분기 실질경제성장률은 6.6%.선진7개국중 가장 높았고 일본정부는 올해 3%대의 성장도 가능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2분기에 마이너스 2.9%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경제의 체온계인 일본의 주가와 금리도 곤두박질치고 있다.

금융기관들은 기업대출이나 주식투자 대신 자금을 보다 안전한 국채쪽으로 돌리면서 돈이 있어도 돌지않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MIT대의 루디거 돈부시 교수는 최근, 이런 일본경제의 모습을 "기본적으로 빈사상태" 라고 진단했다.

그는 미.일간의 경제적 체력차이로 엔화는 달러당 1백40엔까지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예상하기도 했다.

일본 국내에도 '0%대 성장 불가피론' 이 확산되고 있다.

일본의 13개 주요 경제예측기관들은 일제히 올해 국내총생산 (GDP) 실질성장률을 평균 0.57%로 내려잡았다.

정부 수정 전망치 (1.9%) 조차 이미 딴 나라 얘기처럼 되어버렸다. 경기침체의 직접적인 원인은 지난 4월의 소비세율 인상 (3%→5%) 이다.

경제기획청의 누가야 신페 (糖谷眞平) 사무차관은 과거 소비세율 인상시의 경험등을 토대로 "9월까지는 소비세율 인상의 영향이 소멸되고 경기회복세가 다시 정상궤도에 진입할 것" 이라고 예상했지만 그 전망은 완전히 빗나갔다.

세율 인상 전인 1~3월중 발생한 가수요는 4조1천억엔 (GDP의 0.9%) 으로 예상을 크게 웃돌았다.

이에 따른 반작용은 곧바로 나타났다.

4월 이후 거품이 일시에 사라지면서 2분기에는 민간소비지출이 전기대비 5.7% 감소했고 주택건설도 11.5%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1분기 6.6% 성장은 그야말로 허상 (虛像)에 불과했던 것이다.

최근 수년간의 저금리와 가격파괴로 일본 소비자들은 소비세율 인상에 과거보다 훨씬 민감한 방어적 행동을 보인 것이다.

내수위축은 건설.유통등 내수업종에 곧바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3개월동안 일본기업의 부도 (금액기준) 는 전년동기 대비 1백5% 증가한 5조9천3백억엔 (45조원)에 달했다.

이는 분기기준 사상 2번째로 많은 것이다.

특히 제조업체의 부도가 전년동기 대비 3.3% 감소한 반면 내수업종인 건설업체 부도는 24.3%, 유통업체 부도도 12.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닛케이 평균지수는 연일 연중 최저치를 경신해 1만7천엔대를 위협하고 있다.

89년 미국을 능가하기도 했던 도쿄증시의 시가총액은 뉴욕의 3분의1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또 10년짜리 장기국채의 이자율은 사상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7%대로 떨어졌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마이너스 금리나 마찬가지다.

금리가 내리면 주가가 오른다는 경제법칙과는 달리 주가와 금리의 동반폭락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유일한 희망은 수출이다.

엔화약세에 힘입어 97회계연도 상반기 (97.4~9) 중 수출은 전년동기비 15.6%의 높은 증가세를 보였다.

반면 같은 기간 수입은 6.4% 증가에 그쳐 올해 4~9월중 무역흑자는 전년동기비 무려 75.9% 늘어난 5조1천여억원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수출이 일본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로 줄어들었다.

수출확대만으로 경제전체를 끌어나가기에는 일본경제의 덩치가 너무 커져버렸다는 얘기다.

또 수출과 국내경기의 연관관계도 엷어지고 있다.

사상최고의 이익을 올리고 있는 수출기업들이 국내투자 대신 해외 현지투자에 열을 올리고있기 때문이다.

또한 확대되는 무역흑자는 통상마찰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미국이 일본의 어려운 상황을 감안, 엔화강세로의 환율조정등을 강하게 요구하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를 용인하리라고는 생각키 어렵다.

그나마 일본경제를 지탱해온 수출도 동남아 통화위기와 함께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일본의 전체 수출중 아시아의 비중은 43.2%.닛쿄 (日興) 리서치는 "아시아의 경제혼란으로 올해 일본 경제성장률은 0.7% 추가 하락할 것" 이라고 추산했다.

또 미쓰비시자동차가 1백억엔이 넘는 환차손을 입은 것을 비롯, 아시아 지역에 투자한 일본기업들은 통화위기로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이런 내우외환으로 일본경제는 지금 기로에 서있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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