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 그윽하게 … 오크통의 마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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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같은 레드 와인이라고 해도 묵직한 맛이 나는 ‘쉬라즈’는 미국산 참나무통(오크통)에서, 부드러운 ‘보르도’는 프랑스산 참나무통에서 주로 숙성시킨다. 미국산 참나무에 와인을 넣어 보관하면 참나무 속 화학성분이 진하게 우러나오지만 프랑스산 참나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레드 와인이 각양각색이듯이 참나무도 여러 가지다. 와인이 급속히 대중화되면서 와인의 숙성비법도 애호가들 모임에서 화제에 자주 오르곤 한다. ‘나무 박사’인 전남대 김윤수(수목학) 총장과 함께 오크통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풀어본다.

◆100년 넘은 고목이 좋아

대나무에 술을 담아 놓으면 한 달도 못 돼 술이 증발해 버리기 십상이다. 대나무에 수분과 자양분이 오가는 물관이 있는데 이것이 뚫린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참나무에도 그런 물관이 남아있다면 와인이나 양주 숙성용으로 애초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참나무, 그것도 미국산 화이트 참나무는 고목이 될수록 물관이 타일로시스라는 알갱이 같은 세포로 꽉 막혀 버린다. 미국산 붉은 참나무는 그렇지 않다. 한국에도 상수리나무·굴참나무 같은 참나무류가 있지만 물관이 제대로 막히지 않는다. 오크통 재료로 아시아산 참나무가 거의 쓰이지 않는 연유다. 프랑스산 참나무는 미국산보다는 타일로시스가 적어 물관과 같은 방향으로 나무를 제재하지 않으면 와인이 샌다. 고목이 될수록 물관이 막히는 것은 술통으로서의 기본인 ‘술이 새지 않을 것’ ‘술맛을 좋게 할 것’ 중 하나를 충족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술통으로 애용하는 참나무는 미국산 화이트 참나무와 프랑스 등 유럽산이다.


◆어떻게 향과 맛을 좋게 하나

오크통이 술이 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술통으로 사랑받는 건 아니다. 물관이 타일로시스로 막혀 있는 것으로만 치자면 아카시아나무도 화이트 참나무에 결코 뒤지지 않지만 술통으로 쓰진 않는다. 술의 맛을 개선하는 효과가 적기 때문이다. 참나무는 와인이나 양주에 색상과 향기를 더하고 맛을 더 고급스럽게 변화시키는 ‘마력’을 지녔다. 오크통의 결정적 위력이다. 알코올 성분은 색이 없고, 특유의 독한 냄새가 난다. 이를 오크통에 넣어두면 술맛을 부드럽게 하고 매혹적인 색을 띠게 만든다. 알코올 농도 20여 도의 소주보다 40여 도의 양주의 맛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건 오크통 덕분이다. 참나무에는 떫은맛을 내는 타닌, 쓴 아몬드향의 푸르푸랄, 캐러멜향의 말리톨 등 많은 종류의 화합물질이 들어 있다.

◆완성 직전 불에 그을려

오크통의 막판 완성 단계에서는 꼭 거치는 과정이 있다. 오크통 안쪽을 불에 그을린다. 이를 토스팅이라 한다. 이 과정 또한 숙성하는 와인 맛에 큰 영향을 준다. 코코넛향을 내는 락톤 화합물의 향은 이때 더 진해진다. 탄수화물 분해산물인 당분 역시 토스팅 때 많이 만들어진다. 토스팅은 불의 강도에 따라 약·중·강으로 나눈다. 약한 불에 잠깐 그을리면 과일향이 진하고, 떫은맛이 약간 나는 와인을 만드는 오크통이 된다. 약 15분을 그을리면 내부가 갈색으로 되며, 바닐라향이나 커피향을 내는 와인을 만들어낸다. 불에 태우다시피 강하게 그을리면 볶은 원두거피향, 구운 빵, 구운 고기 맛의 와인을 만드는 오크통으로 변신한다. 강하게 그을린 오크통이 약하게 한 것보다 타닌 성분이 적다. 강하게 그을리면 나무 속의 화합물이 우러나오는 양도 적다. 오크통 속에서는 효모가 참나무 성분을 전혀 다른 성분으로 바꿔 버리기도 한다. 쓴맛을 내는 푸르푸랄이 효모를 통해 훈제 고기 또는 가죽 냄새 등으로 좀 더 부드럽게 바꾼다. 화이트 와인은 거의 오크통에 숙성을 하지 않는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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