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공방에 금융권 공신력 실추·자금이탈 몸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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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비자금 파문으로 예금자 비밀보호에 구멍이 뚫리고 있다.

정치권의 비자금 공방속에 예금주 이름과 계좌번호가 공공연히 폭로되면서 뭉칫돈의 이탈조짐과 함께 금융권 전체가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다.

16일 금융계에 따르면 신한국당의 비자금 예금계좌 폭로 이후 관련 은행에는 "내 계좌가 공개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는 고객의 항의전화가 빗발치는가 하면 외국계 은행으로 예금을 옮기겠다는 예금주도 나타나고 있다.

비자금설에 연루된 한 시중은행의 고객관리담당 차장은 "10억원짜리 거액 정기예금을 맡긴 고객이 비자금관련 계좌공개 직후 예금을 빼갔으며, 외국계 은행으로 예금계좌를 옮기겠다는 예금주도 늘어나고 있다" 고 밝혔다.

재산 노출과 금융거래정보의 유출을 꺼리는 예금주들로서는 누구 책임이든간에 예금정보가 은행밖으로 흘러나간다는 사실 자체에 불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다른 시중은행의 창구관리자는 "일선 지점에선 예금주들의 항의성 전화가 빗발친다" 며 "일선 창구에서는 조그만 실명제 위반사례도 중징계를 받는데 수십개 계좌가 언론에 공개돼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면 앞으로 실명제 자체가 유지될 수 없을 것" 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비자금 파문으로 가장 큰 홍역을 치르는 곳은 첫 진원지가 됐던 동화은행. 동화은행 관계자는 "동화은행의 계좌가 공개적으로 제시되면서 은행의 신뢰도가 크게 떨어졌다" 면서 고객들의 문의와 항의전화가 빗발치는 바람에 이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린다고 전했다.

금융계 일각에선 이런식으로 정치권에 의해 비밀보호규정이 무시된다면 그간 음성적으로 이뤄졌던 차명예금거래등이 일선 창구에서 다시 고개를 들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하고 있다.

금융기관들이 자금이탈사태에 직면하게 되면 실명제를 피할 수 있는 각종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불안해하는 거액예금주들을 붙잡을 것이란 얘기다.

결국 비밀보호 규정이 허물어짐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부실채권의 누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금융계는 자금이탈과 공신력 실추라는 이중고를 겪게 됐고 금융실명제 자체도 위협받게 된 셈이다.

그러나 실명제 운용을 총괄하는 재정경제원은 정치권의 '고래싸움' 을 피해관망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재경원 관계자는 "비밀보호조항을 피해 금융거래 정보를 얻어냈더라도 이를 실명제로 제재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고 인정하면서도 "실명제 대체입법에서도 관련조항을 강화하거나 수정할 의사는 없다" 고 밝혔다.

김종수·이정민·박장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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