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다리 굳는 희귀병 대학생, 세상이 손 내밀자 가슴 열고 웃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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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20개월 때까지 걷지 못했다. ‘조금 늦는 거겠지’라고 위안을 삼았던 건 엄마의 희망이었다. 팔·다리는 화석처럼 점점 굳어져 갔다. 초등학생 때 발이 뒤틀려 평지조차 걷기 어려웠다. 고교생 땐 아예 걸음을 옮길 수 없게 됐다. 그런데도 경북 포항시 효자동 POSTECH(옛 포항공대) 신입생 300명 대열에 당당히 선 백민우(17·지체장애 1급)군.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이 대학의 화학과 새내기다. 선천성 불치병(샤르코-마리-투스)은 운명처럼 그를 따라 다닌다. 몸의 말단 신경이 죽어 손발이 점차 오그라드는 병이다. 그런 민우가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 권용실(49)씨의 품을 떠나 전동 휠체어에 의지하며 낯선 세상과 마주했다.


# 낯섦 12일 오전 8시 POSTECH 기숙사 21동 201호의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분명 민우의 방이었지만 문을 열어준 건 자원봉사자 권오현(60)씨였다. 권씨는 민우의 발을 씻기고 있었다. 권씨는 포항장애인복지관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다. 포항시와 POSTECH이 힘을 합쳐 민우의 생활을 도와줄 자원봉사자를 구한 결과 권씨가 4일부터 민우의 아침 시간을 책임져 주고 있다. 민우는 학기가 시작한 2일부터 통 입을 열지 않았다. 자원봉사자 권씨는 “민우가 많이 불편해한다”고 말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 것이다.

어머니 권씨는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권씨는 “어릴 때부터 장애인이라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다”며 “초등학교 땐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았고, 힘센 친구들이 머리카락을 마구 자른 것도 수차례나 된다”고 울먹였다.

민우에게 공부란 장애인에게 닫혀 있는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출구였다. 펜을 잡기 힘들어 모든 수학 문제는 암산으로 풀었다. 한 문제를 수십 번씩 읽고, 모든 계산을 머리로 한 것이다. 고교 때는 영어단어를 하루 100개씩 외웠다. 책과 소설·드라마 등으로 영어를 독학해 텝스 성적이 880점이다. POSTECH 진학을 준비하면서 일반화학과 유기화학 등 대학 교재를 혼자 공부했다. 고교 내내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다. 내신성적과 수학·과학 심층면접으로 전형한 수시 일반전형을 거뜬히 통과했다. 민우는 “엄마를 떠난 것은 처음이어서 대학생활을 제대로 할지 걱정스러웠다”고 말했다.

①13일 생활도우미 자원자인 권오현(60)씨가 우산을 받쳐들고 백민우군(左)의 수업 이동을 돕고 있다. ②엘리베이터를 타고 강의실로 가는 모습. ③‘전산 LAB’ 수업시간에 백군이 김성철 조교한테서 프로그래밍 언어 설명을 듣고 있다. [포항=최명헌 기자]


# 배려 이날 민우가 기숙사·식당·강의실로 향하는 길엔 경사로 12곳이 설치돼 있었다. 민우의 휠체어가 쉽게 지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한 대학 측의 배려였다. 최종연(51) 학생지원팀장은 “민우가 지나다니는 동선을 파악해 곳곳에 경사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대학 측은 경사로 설치를 위해 1600만원을 들였다. 그래도 학교 안엔 장애물이 남아 있다.

민우가 학생식당을 거쳐 강의실이 있는 무은재 기념관까지 가려면 ‘78계단(계단 수가 78개라 붙여진 이름)’을 올라야 한다. 일반인은 5분이 채 안 걸린다. 하지만 계단을 올라갈 수 없는 민우는 한참 돌아가야 했다. 15분이 걸렸다. 무은재 기념관에 들어서자 또 하나의 장벽이 기다렸다. 얼마 전까지 도서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라 엘리베이터는 내부관리용으로만 사용됐던 상황. 휠체어 한 대가 들어가면 꽉 찬다. 발판을 접어야 하고, 다리를 밀어 넣어줘야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데만 5분 넘게 걸렸다.


최 팀장은 “78계단에 휠체어리프트(7800만원 소요)를 설치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라며 “민우군이 학교생활을 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지 수시로 점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총학생회도 민우 돕기에 나섰다. 총학생회가 학교 홈페이지에 “거동이 불편한 민우를 위해 관심 갖고 돌봐줄 룸메이트를 찾는다”는 공지문을 띄운 것이다. 게시판을 본 남윤(20·생명과학과 3년)씨가 흔쾌히 자원했다. 남씨는 “장애를 이겨낸 민우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며 “일반인이 장애인을 돕는 게 아니라 선배로서 민우의 학업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 공감 이날 오후 10시부터 기숙사 같은 층을 쓰는 선후배의 만남이 있었다. 민우도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이어진 자리에 끝까지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그도 동료의 배려와 따뜻함 앞에서 미소를 피웠다.

그 덕분일까. 13일 오전 학생식당에서 기자를 만난 민우는 훨씬 밝아진 모습이었다. 식사를 같이 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우리 학교 밥 괜찮죠?” 농담까지 건넸다.

오전 수업이 끝난 뒤 민우는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친구들도 민우의 전동 휠체어를 밀어줬다. 오근하(18·기계산업공학부)군은 “처음에는 민우가 우리를 경계하는 것처럼 보여 어떻게 가까워져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며 “이제는 친구들 모두 민우를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편하게 대하기 때문에 시일이 지나면 좀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화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선택한 길. 민우는 학교와 동료의 배려로 낯선 세상에 마음을 열었다.

포항=최석호 기자 , 사진=최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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