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오조지’를 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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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먼저 국정원이다. 중정(中情) 또는 안기부라는 옛 이름이 더 어울릴 법한데 마음에 안 드는 백성은 무조건 ‘빨갱이’라고 우겨 족치고 보는 것이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도 “아니면 말고”다. 다음은 국세청이다. 말 안 듣는 기업은 세무조사를 벌여 꼬투리 잡는 것이다. 비 오는 날에도 털면 먼지가 나는 법인지라 세무조사 말만 들어도 경기를 안 일으킬 기업이 없다. 잡힐 흠이 없더라도 업무 마비는 물론 대외 신용도가 엉망이 되니 피해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경찰이 빠질 수 없다. 문자 그대로 마구 조져서 없는 죄도 만들어낸다. 대놓고 주먹을 날리는 것 말고도 ‘통닭구이’ ‘고춧가루 물 붓기’ 등…. 조지는 방법도 다양하다. “탁” 하고 쳤더니 “억” 하고 쓰러졌던 전설도 경찰 것이다.

검찰도 있다. 이들의 무기는 ‘소환’과 ‘구속영장’이다. 죄가 있건 없건 무조건 부르고, 죄가 크건 작건 무조건 잡아넣고 보는 것이다. ‘확정 판결 전 무죄 추정의 원칙’은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나중에 무죄로 나와도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은 명예 회복할 길이 없다. 마지막으로 법원이다. 판결을 안 내리고 재판을 질질 끄는 것이다. 가장 소극적인 조지기 수법인데 사람 엿 먹이는 데는 이만큼 강력한 게 없다. 예컨대 재산권 소송에서 판사가 늑장 부리는 사이 피고가 재산을 다 빼돌려 원고가 승소해도 남은 건 껍데기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고백하자면 ‘육조지’란 말도 있었다. 언론이 들어간다. 기사로 일단 조져 놓고 “아니면 말고”다.

설명이 장황했지만 오해는 마시라. 옛날에 그랬단 얘기다(언론도 그렇다). 과거 관존민비(官尊民卑) 시대에나 가능했을 뿐 요즘 세상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 아닌가. 지금은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존재할 정도다. 그 씁쓸한 풍경을 법원 쪽에서 목격하고 있듯 말이다. 판결을 늦추기는 마찬가지인데 조지기 위한 게 아니라 민초(?)가 두려워서다. “촛불을 들어 사회를 마비시켜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이명박 정부를 주저앉히는 것”이라 공공연히 외치던 반사회세력들에 대해 반년이 넘도록 1심 선고를 하지 않았다. 어떤 판사들은 아예 재판 날짜조차 잡지 않았다. 그 사이 인사가 나서 골치 아픈 판결은 후임 재판부에 떠넘겨졌다.

이런 사태를 우려해 신속한 재판을 독려했던 법원장은 궁지에 몰렸다. 조사단의 결론처럼 재판 개입의 흔적은 분명 있어 보인다. 사법행정권의 남용으로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흙탕물 튈 걸 꺼려 제 할 일 팽개친 판사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순 없다. 야간시위 금지에 대한 위헌 제청이 있었다지만 여태껏 위헌 제청 탓에 간통죄 판결을 미룬 판사들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재판의 독립성은 판사 스스로 책임을 다했을 때 얻어지고 강화되는 것이다. 그들이 법정 밖에 있는 사이 이 신형 ‘오조지’는 공권력이 신뢰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골병을 더욱 고황 깊숙이 몰고 간다. 이어 터진 용산 사건 역시 법관의 침묵과 무관하지 않을 터다. 그런 무소신 회피들이 뇌혈관을 막아 코마 공권력이 된 사회에서 재판의 독립성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세상은 제 할 일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돌아간다. 눈치 안 보고 법봉 두드리는 대부분의 판사들처럼 말이다. “각자 자기 문 앞을 쓸어라. 그러면 거리는 깨끗해진다. 각자 자기 과제를 다하라. 그러면 사회는 할 일이 없어진다.” 니체의 말이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