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마지막 작 ‘클린 히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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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84→2808. 노장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79·사진左)가 주연·감독한 ‘그랜 토리노’의 미국 개봉 후 상영관 수 변화다. 지난해 12월 6개관에서 소리소문 없이 출발한 이 영화는 개봉 5주 만에 2800여 개 상영관으로 보폭을 넓히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개봉한 지 사흘 만에 제작비 전액(3500만 달러)을 회수했고, 영국·호주·프랑스 등에서도 승승장구하며 최근까지 1억4000만 달러의 수입을 거둬들였다. 이스트우드 주연작 혹은 연출작 중 최고 성적이다.


이같은 ‘슬리퍼 히트’의 비결은 역시 입소문.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고집불통 노인 월트 코왈스키의 파워풀한 흡인력이다. ‘그럼피 올드맨’의 ‘더티 해리’버전이랄까. 잔뜩 갈라진 쉰 목소리로 마지못해 내뱉는 까칠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요절복통이다. 꿈틀대는 눈썹에 복잡미묘한 감정을 실어보내는 그의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연기는 배역과의 절묘한 화학작용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배우’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에 참전했고 포드자동차에서 수십 년간 일하다 은퇴한 월트는 아내와 사별한 후 홀로 살고 있다. 그는 자식들에게 별로 애정이 없고 타인에 대해서도 폐쇄적이다. 이웃에 사는 아시아계 소수민족, 즉 몽족에 대한 인종차별적 시각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러던 그에게 변화가 찾아온다. 애지중지하던 포드사의 1972년산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이웃 소년 타오右가 훔치려다 실패한다. 타오에게 벌을 주기 위해 갖가지 잔심부름을 시키던 월트는 난생 처음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러나 타오를 비롯한 몽족 사람들과 독거노인의 우정은 갱단의 폭력과 얽히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던 월트는 영화 마지막 엄청난 ‘선택’을 하면서 자신의 의미 없던 생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 선택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선택이 갖는 무게감마저 부정하긴 어렵다. 월트의 선택은 인종차별적 시선이 곳곳에 지뢰처럼 포진하고 있는 이 ‘위험한’ 영화를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로 만드는 절묘한 역설을 빚어낸다.

이 영화의 흥행 이변에 대해 때마침 찾아온 전 세계적 불황이 이 블록버스터 같지 않은 영화를 블록버스터로 만들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고 보니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들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흔히 만나기 힘든, 그리고 지금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불황의 직격탄을 맞는 노동자 계층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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