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하고 세금 떼도 연 7~30% 고수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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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호 30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재테크도 마찬가지다. 주가와 금리·부동산 등 자산가격이 함께 떨어지는 악조건 속에서 소리 소문 없이 인기몰이를 하는 상품이 있다. 은행이 부자 고객들에게 알음알음으로 판매하고 있는 외화표시채권 투자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활성화된 외화표시채권 투자는 최저 7%, 최고 30%의 연 수익률을 자랑한다. 각종 비용과 세금을 다 뗀 뒤의 수익률이다. 시중은행의 한 PB는 “예약이나 사모 형태로 판매되기 때문에 일반인은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전했다

부자들의 재테크, 외화표시채권

위기에서 태어나다
외화표시채권은 한국 정부나 기업들이 달러나 유로·엔화를 조달하기 위해 해외시장에서 발행한 채권이다. 2007년 말까지 만기 2∼4년, 금리 연 5∼6%대로 많이 발행됐다. 외국계 증권사가 발행을 맡아 해외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와 헤지펀드 등에 주로 팔았다. 당시만 해도 이 같은 조건은 국내 투자자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다. 사정이 달라진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한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돈이 급해진 헤지펀드 등이 매물을 내놓으면서 외화표시채권 값이 급하게 하락했다. 세계적인 신용경색으로 한국 채권에 대한 가산금리가 치솟은 것도 한몫했다. 몇 개월 전보다 20∼30% 떨어진 채권이 수두룩해졌다. 같은 기업이 원화로 발행한 채권보다 외화표시채권 값이 훨씬 싼 상황이 된 것이다. 채권 값이 떨어지면 수익률은 거꾸로 올라간다. 똑똑한 돈(스마트 머니)에겐 기회였다.

시중은행 중 발 빠른 곳들이 먼저 움직였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10월 웰스매니지먼트센터 고객들의 돈을 모아 홍콩 시장에서 LG디스플레이 채권을 사들였다.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산 채권의 기대 수익률이 연 40%에 달했다. 4%의 환헤지 비용과 1%의 세금을 떼도 고객에게 34%의 수익을 안겨 줄 수 있게 됐다. 입소문이 나면서 다른 은행들도 KCC·현대캐피탈·삼성중공업 등의 외화표시채권을 고객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국민은행 김명권 PB상품팀장은 “KCC의 채권 등급이 국제적으론 BBB지만 국내에선 AA0”라며 “외국에서 보는 한국 채권의 가치와 국내 투자자가 보는 가치가 다른 데서 발생한 일종의 차익거래 투자”라고 말했다. 최근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달러를 조달하려고 발행한 해외채권 중 상당 부분을 국내 기관투자자들이 사들여 문제가 된 것도 이런 시장 상황에서 비롯됐다.

국가 신용도 높이는 데도 도움
돈이 몰리면서 수익률은 점차 떨어지고 있다. 국민은행이 지난달 사모펀드 형태로 판매한 산업은행 달러표시 채권의 경우 세전 기대수익률이 7%였다. 하나은행이 같은 달 판매한 현대캐피탈 엔화표시 채권은 14.5%였다. 하지만 연 3%대로 급락한 은행 예금금리에 비하면 훨씬 높은 수준이다.

세금 부담도 적다. 채권은 발행 당시 표시된 금리에 대해서만 세금을 물린다. 연리 5%, 액면가 1억원짜리 채권이라면 이자수익 500만원에 대해서만 소득세를 내게 된다.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은 환헤지로 없앨 수 있다. 채권의 원리금에 해당하는 외화를 선물환으로 매도하는 방식이다. 원화 값이 떨어지면 선물환에서 생기는 손실이 채권의 원화표시 가격 상승으로 상쇄된다. 해외 주식형 펀드에 투자했을 때처럼 헤지를 하고도 낭패를 볼 위험이 없다. 주식형 펀드와 달리 채권은 만기 때까지 가치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상품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엔 은행이 해외에서 싸게 구한 채권을 수수료를 뗀 뒤 개인고객에게 파는 단순한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헤지는 고객이 직접 해야 했다. 이런 불편을 없애기 위해 최근엔 은행이 증권사나 운용사에 의뢰해 미리 헤지를 한 사모펀드나 신용연계채권(CLN) 형태로 내놓고 있다.

외화채권에 투자한다는 점이 달러 사정을 더 악화시키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해다. 헤지 과정에서 채권 구입에 쓰이는 외화보다 더 많은 금액을 선물환 매도에 걸어둔다. 박근훈 하나은행 웰스매니지먼트센터 상품개발팀장은 “액면가와 실제 구입가 사이의 차액만큼 달러 값을 내리는 요인이 된다”고 설명했다. 국제 채권시장에서 지나치게 저평가된 한국물의 가치를 떠받치는 효과도 있다. 박 팀장은 “해외에선 막연히 한국을 불안하게 생각하지만 국내 기업 사정은 국내에서 훨씬 잘 알지 않느냐”며 “국내 자금이 외화표시채권을 사 주는 게 외국인의 불안감을 완화시키고 국가신용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만기 짧은 채권 골라야
외화채권 투자도 개인이 채권에 투자할 때의 단점을 그대로 갖고 있다. 우선 한번 사면 되팔기 어렵다. 최소 수십억원 이상이 거래 단위인 채권시장에서 몇천만원 또는 몇억원짜리 채권은 팔기도, 제값을 받기도 힘들다. 해외채권 거래가 적은 국내시장에선 더욱 그렇다. 따라서 만기까지 갖고 있겠다는 생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은행들도 이런 점을 감안해 만기가 1년 안팎인 채권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일반 투자자에게 접근이 힘들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국내에서 해외채권에 투자하려면 조건이 까다롭다. 금융회사 채권은 발행하자마자 살 수 있지만 일반 기업 채권은 발행 1년 뒤에야 살 수 있다. 투자 대상이 한정돼 있다는 얘기다. 이런 채권이 싼값에 시장에 매물로 나오는 경우도 많지는 않다. 국민은행 김 팀장은 “수요는 충분하지만 공급이 제한돼 있다 보니 은행과 오래 거래해 온 부자 고객들에게 먼저 순서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채권 투자에서 최악의 악몽은 기업 부도다. 현재 투자 대상이 되고 있는 기업은 대개 각 분야에서 1, 2위를 다투는 기업들이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부여한 등급도 A- 이상이다. 투기등급 채권은 은행이 취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침체가 깊어지면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신용등급과 별개로 만일의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부도 위험뿐만 아니라 부도가 날 때 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의 비율이 얼마인지도 미리 생각하고 투자해야 한다는 얘기다.

은행들이 발행한 후순위 외화채권엔 최근 기간 리스크와 평가(가격) 리스크가 추가됐다. 지난달 우리은행이 외화표시 후순위채를 되사는 것(콜옵션)을 포기하면서부터다. 국내 은행의 후순위채는 그동안 채권에 표시된 만기가 아니라 콜옵션 행사 시기를 사실상 만기로 해 왔다. 우리은행이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음에 따라 채권 보유자들은 5년을 더 기다려야 원금을 돌려받게 됐다. 이후 우리은행뿐만 아니라 다른 시중은행들의 후순위 외화채권 값이 줄줄이 급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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