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가정이 폭발하는 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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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일본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을 무대로 한 ‘도쿄 소나타’에는 유독 식사하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네 식구가 모두 모여 밥먹는 장면은 딱 한번 나온다.

어쩐지 서정적인 제목 때문에, 천재 소년이 주인공인 음악영화나 촉촉한 멜로로 오해하지 마시길. ‘회로’ ‘밝은 미래’ ‘절규’ 등으로 서구영화제를 휩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에, 가가와 데루유키·고이즈미 교코·야쿠쇼 코지에 이르는 실력파들이 가세했다. 2008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심사위원상 수상작이다.

영화는 평범한 가장 류헤이(가가와 데루유키)가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족에게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그는 매일 공원으로 출근해 비슷한 처지의 가장들을 만난다. 초등학생인 막내 아들 겐지(이노와키 가이)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지만 아버지가 반대하자 원망을 키운다. 얼굴 한번 보기 힘든 큰 아들은 느닷없이 미군에 자원입대한다. 이처럼 아슬아슬한 갈등을 그럭저럭 봉합하며 가족을 식탁 앞에 모아 앉히는 것은 아내 메구미(고이즈미 교코). 아무도 모르는 외로움에 시달리던 그녀 역시 집에 얼치기 강도(야쿠쇼 코지)가 들면서 심하게 흔들린다.

영화는 일본 현대 가정의 초상이다. 경제난, 실직, 가족간 소통부재, 위기의 주부 등은 일본을 뛰어넘어 현대 사회의 초상이기도 하다. 평범한 전반부를 돌아 강도사건 이후 가족은 생사가 의심스러운 극한적인 상황에 몰린다. 물론 영화는 파국을 향해 가지 않는다. 결국 가족은 제각각 집으로 돌아와 다시 식탁에 모여 함께 밥을 먹는다. 부모 몰래 피아노를 배워 천재적인 실력을 과시하게 된 겐지가 콩쿠르에서 연주하는 마지막 장면은, 감독에 따르면 “가족을 구원하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다.

‘유레루’ ‘도쿄’(봉준호 편)에 출연해 국내 관객에게도 익숙한 가가와 데루유키는 또다시 그가 왜 명배우인지를 웅변해보였다. 내성적인 주부에서 한순간 폭발하며 진폭이 큰 연기를 선보인 고이즈미 교코 역시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영화는 적막이 흐르는 식사 장면, 무표정하게 떼지어 출근하는 모습 등 현대인의 일상을 인상적으로 포착해낸다. 사회비판적인 공포물로 주목받은 구로사와 감독이 호주 출신 작가 맥스 매닉스의 각본을 새롭게 해석한, 첫 가족영화다. 엔딩 역시 이례적으로 인상적이다. 겐지가 드비시의 ‘달빛’을 연주하고 홀린 듯 사람들이 모여든다. 연주를 끝낸 겐지와 부모가 걸어나가자 갑자기 암전. 극중 연주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흩어지는 발걸음 소리만 어두운 극장에 가득하다. 거기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가 이 영화의 포인트. 19일 개봉.

주목! 이 장면 강도와 동행하게 된 메구미가 “지금까지의 삶이 전부 꿈이고, 눈을 뜨는 순간 전혀 다른 내가 돼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말하는 대목. 조울증을 앓는 어설픈 강도에게 하는 말이지만 실상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어쩌면 삶에 지친 예민한 관객들에게 감독이 하는 말일 수도 있고.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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