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우려되는 국가 위기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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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의 원로언론인 돈 오버도퍼는 최근 저서에서 94년 5월 북한핵문제로 긴장이 고조됐을 당시 미국정부의 전쟁계획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한국전이 끝난지 40여년만에 한반도에 또 다시 전면전을 불사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얘기는 우리를 경악케 한다.

북한의 전쟁준비설은 분단 이후 수없이 들어 왔던 일이지만 이번엔 북한의 동기부여에 따른 미국주도의 전쟁계획이라 더욱 놀랍다.

북한이 영변지역 핵시설에서 사용후 핵연료봉의 교체를 시작하자 핵무기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 추가추출을 우려한 미국정부는 북한핵시설 폭격을 심각하게 검토했다.

아울러 부분적인 폭격이 전면전으로 확산될 가능성에 대비해 미국은 한반도에 미군 1천명을 증파하고 패트리어트미사일과 공격용 첨단장비를 반입하는 등 실전 (實戰) 대비를 진척중이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당시의 심각한 상황전개에 대해 미국측으로부터 얼마나 소상하게 통보받고 있었는지, 또 정부가 알고 있었다면 정부안에서 어떠한 논의과정을 거쳤는지, 그 결과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 어떤 입장으로 대처했는지, 그리고 국민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려는 노력에까지 과연 생각이 미쳤는지 등등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극소수관리들만 당시의 긴박한 사정을 인지했던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미국의 움직임이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켜 실전으로 확대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국민들을 향한 정황설명은 차치하고라도 정치지도자들과 주요기업 및 언론계 대표 등 사회의 여론조성층조차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 채 전쟁고비를 넘겼다.

한마디로 미국은 한반도내 전면전 발발시 예상되는 피해상황까지 비교적 소상하게 추정하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한국정부는 민심 (民心) 혼란만 걱정하고 있었던 꼴이다.

당시 우리 정부는 같은 해 3월 남북간 특사교환을 둘러싼 접촉에서 북측대표 박영수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촉발된 국민들의 '라면 사재기' 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보인 어설픈 행태를 두고두고 석연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

미국은 이제 국내정치적 이유로 강경과 온건 사이를 넘나든 지난날 한국정부의 대북 (對北) 정책 혼선이 불가피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말 한마디에 법석대는 한국이 정작 행동으로 북한을 응징 (膺懲) 하는 단호함을 보여야 할 때는 뒤로 물러앉는 우유부단함을 미국은 심히 우려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정부의 대북정책이나 우방을 대하는 자세에 일관성이 없었다는 한가로운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닌 듯싶다.

우리에게 닥칠 갖가지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방안 논의가 본격화돼야 한다.

그리고 대처방안에는 국민들을 설득하는 작업도 포함돼야 마땅하다.

국민들에게 국가가 처한 어려운 현실을 알리며 이해를 구하는 데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지난주 뉴욕에서 미.일 양국은 방위지침 개정안을 발표했다.

양국간 합의문건은 한반도내 급변사태를 염두에 둔 협력관계를 상정한 것이라는 데 이견 (異見) 이 없다.

이렇듯 주변국들이 우리 영토안에서 벌어질 예측 못할 사태에 대비해 자국민 대피책까지 마련하는 마당에 우리 정부가 취하고 있는 안이하고 어정쩡한 태도는 우방의 의구심만 낳는다.

국가에 대한 신뢰는 정부의 정책과 지도자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국가의 위기관리능력은 국가지도자 한 사람의 통치스타일보다 사회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가에 따라 평가된다.

유능한 대통령을 뽑기 위해 당분간 정치판의 혼란은 불가피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라밖에서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지경이라면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국민들에게 알리며 정부에 대한 믿음을 호소해야 한다.

국민들의 성숙한 자세를 촉구할 자신이 없는 정부에 위기관리능력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길정우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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