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립스틱 불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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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성들이 입술에 붉은 색을 칠하기 시작한 유래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추측들이 많다.

가장 보편화된 설 (說) 은 샤머니즘 문화권에서 '붉은 색은 귀신을 쫓는다' 는 속신 (俗信) 을 신봉했기 때문에 주색금기 (朱色禁忌) 의 차원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중국에서는 후궁 (後宮) 들이 생리중일 때 왕을 모시지 못한다는 표시로 뺨에 연지를 바른 것이 립스틱의 효시라는 설이 그럴듯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밖에 원시사회의 남성들이 짐승사냥을 하고나서 용맹을 과시하려 입가에 피를 묻히고 다닌 것을 여성들이 흉내냈다는 설도 있다.

어느 것도 정확지는 않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계 모든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입술에 붉은 색을 칠하기 시작했으며, 그 '붉은 색' 을 만드는 방법도 각각 달랐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폴데로스' 라는 식물뿌리에서 분홍색 염료를 뽑아냈고, 로마에서는 해초에서 붉은 색소를 추출해 썼으며, 동양에서는 주로 홍람화 (紅藍花.잇꽃) 와 주사 (朱砂)가 연지 (嚥脂) 의 재료로 쓰였다.

연지화장의 최초 기록이 중국 은 (殷) 나라 때인 기원전 12세기께라고 되어있으니 그 역사는 최소한 3천년이 훨씬 넘는 셈이지만 어쩐 까닭인지 19세기 말까지 색깔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색깔.감촉.광택에 있어서 다양한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선 이후의 일인데 그 한 세기동안의 변화가 3천년간의 변화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가령 40년대까지는 아주 옅은 색깔이 주류를 이루다가 한동안 연한 분홍색이 유행하더니 60년대부터는 거의 흰색에 가까운 창백한 빛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최근에는 어떤 색깔이고 윤기를 많이 내는 립스틱을 즐겨 쓴다는 것이다.

립스틱의 이같은 빠른 변화는 현대인의 취향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남성의 시각이 화장품의 발빠른 변화를 '주도' 한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

경제가 불황의 늪에 빠지면 쪼들릴대로 쪼들린 남성들의 시선이 립스틱에까지 돌아갈 경황이 없을 것은 뻔하고, 여성들은 여성들대로 가계의 부담을 덜기 위해 화장품값부터 줄여나갈 터인즉 가을을 겨냥한 립스틱업계가 전에 없던 극심한 불황을 겪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모두가 '경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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