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질 상승 vs 의료비 상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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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의료법인 설립을 허용한다는 건 한마디로 병원을 운영해 돈을 벌 수 있게 하겠다는 얘기다. 개인이 운영하는 병원이나 의원은 영리병원이다. 의사가 병·의원에서 번 돈을 개인이 가져갈 수 있다.

지난해 7월 인하대병원을 찾은 미국인들이 종합검진을 받고 병원을 나서고 있다. 국내 검진 비용은 미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중앙포토]


서울대·서울아산·삼성서울병원 등 대형 병원은 다르다. 서울대병원은 학교 법인, 아산이나 삼성병원은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비영리법인이다. 이들은 병원에서 번 돈을 바깥으로 가져갈 수 없다. 병원에 재투자해야 한다. 설사 병원이 망하더라도 남는 재산은 국가 소유가 된다. 이런 구조에서는 외부 자본이 병원에 투자하려 하지 않는다. 투자비에 대한 보상을 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영리병원을 허용하게 되면 금융자본이나 산업자본 등이 의료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주식회사 병원이 생기는 것이다.

정부가 영리병원을 허용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일자리 창출이다. 의료업만큼 많고 괜찮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업종이 없다. 상장법인은 연간 1억원 매출을 올리는 데 0.13명이 필요하다. 반면 병원은 1명이 필요하다.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보니 인력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 의료는 상당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의료 기술은 선진국의 81%에 해당한다. 위암이나 간암 수술 능력은 선진국을 능가한다. 성형수술이나 피부과 진료 기술은 아시아권 최고를 자랑한다. 이를 활용해 싱가포르처럼 아시아 의료 허브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영리법인이 허용되더라도 서울아산병원이나 삼성서울병원 등이 영리병원으로 전환할 수 없다. 그러려면 민법의 법인 관련 규정을 고쳐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에 가깝다. 새로 생기는 병원이나 현재의 전문병원, 예치과 등 네트워크 병원들이 영리병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리의료법인 허용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돼 왔다. 각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의료산업 선진화 위원회를 만들어 의료산업을 키울 수 있는 각종 방안을 만들었다. 영리병원 허용도 한 가지였으나 시민단체나 일부 학계의 반대에 부닥쳐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촛불 시위 때 ‘의료 민영화’로 개념이 변질되면서 유야무야됐다.

정부는 영리병원을 허용하되 국민건강보험법상 당연지정제 등 근본 체계는 흔들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지금은 병원을 열면 반드시 건강보험 환자를 진료해야 한다. 영리병원도 건강보험 환자를 받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보건사회연구원 조재국 박사는 “정부 방침대로 현행 건강보험 체계 내에서 영리의료법인을 허용한다면 영리병원에서 건강보험 진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병원 접근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으로 본다”며 “병원이 민간자본을 쉽게 조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말했다.

의료서비스 소비자 입장에서는 영리병원 허용으로 건강보험 급여 항목에서 벗어나는 고급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된다. 반면 영리병원들이 수익을 올리기 위해 비보험 진료 등을 많이 개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국민 전체 의료비는 올라갈 전망이다.

영리의료법인 허용에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영리의료법인 허용→당연지정제 폐지→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 근간 와해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제주대 의과대학 박형근 교수는 “ 규제가 풀려 병원 간 자본 확충 경쟁이 벌어지면 의료비가 빠르게 올라 건강보험으로 지탱할 수 없는 때가 온다”면서 “지금은 건강보험 체제가 유지되겠지만 어느 시점에는 민영의료보험이 건강보험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영리병원이 허용되면 ‘영리법인병원-민간의료보험-부유층과 중산층’의 상층의료제도와 ‘비영리병원-국민건강보험-서민과 중산층’의 하층의료제도로 이원화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9일 성명을 내고 “영리병원은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환자의 의료비 부담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며 “공공병원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낮은 한국에서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건강보험제도 자체가 흔들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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