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박찬호 팬이 느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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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박찬호가 없었더라면 무슨 재미로 살까. "

요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럴만도 하다고 느낀다.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 프로야구팀에서 활약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견한 일인데 당당히 팀의 에이스로까지 떠오르고 있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훤칠한 체격에 얼굴까지도 영화배우처럼 미끈하니 인기가 치솟을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찬호의 활약에 기뻐하다가도 돌아서면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우리들이 온통 이렇게 박찬호 야구경기 중계에나 환호하고 28일의 한.일축구 대결이나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것인가.

' 지난 23일 미국과 일본은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확정했다.

이에 따르면 한반도 주변지역에서 일어난 분쟁에 미국이 무력개입하면서 일본에 협력을 요구할 경우 일본은 자동으로 개입한다.

이는 유사시에 일본 항공기와 함정이 우리의 영공.영해에서 미국과 군사협력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군사적 긴장이 한반도의 남북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의 이에 관한 대응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거니와 다음의 정권을 맡겠다는 사람들은 합종연횡에 바빠 이런 문제에는 한마디 언급도 않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냉엄한 상황이 어찌 군사적 긴장뿐이겠는가.

세계는 이미 사실상의 제3차 대전이라는 '경제전쟁' 에 깊숙이 돌입해 있다.

우리가 요즘 왜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가.

전문가들은 한마디로 우리가 그 경제전쟁의 서전에서 처참히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 선진국들간의 경제전쟁 양상은 열전 이상으로 뜨겁고 치열하다.

그런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최소한 살아남기라도 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 핵심적인 수단은 뭐니뭐니해도 과학기술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경제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국의 지도자들은 다투어 이 과학기술의 진흥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교육과 과학기술에 우리의 21세기를 건다" 고 말했다.

프랑스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교육과 문화, 과학기술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미래를 정복하겠다" 고 다짐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9월12~18일 열린 중국의 제15차 당대회에서는 기술관료들이 대거 진출해 중국의 국가경영 목표와 의지를 뚜렷이 해주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장쩌민 (江澤民) 부터가 대학에서 자동차 기관학을 전공했고 당의 전자공업부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이거니와 서열 2위의 리펑 (李鵬) 이 전력공업학, 3위의 주룽지 (朱鎔基)가 전자공학을, 6위의 웨이젠싱 (尉健行) 이 기계과, 7위의 리란칭 (李嵐淸) 이 기계관리과를 졸업하는등 고위 지도자들이 온통 기술관료인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클린턴 정부가 고어 부통령을 선봉장으로 정보화고속도로 사업을 추진하면서 정보화로 세계경제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패권주의에 유럽 각국은 과학기술과 두뇌, 그리고 자본을 하나로 통합하여 대응하겠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으며 유럽통합이 바로 그를 위한 것의 하나임도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동안 우리들은 무엇을 했는가.

경제전쟁의 보이지 않는 포탄이 머리위로 윙윙거리며 오가는데도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권력싸움 이외에는 별로 한 것이 없다.

최근 한 과학자로부터 "과학기술인 가운데 박찬호팬이 가장 많다" 는 뼈있는 농담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과학기술에 관한 관심은 오히려 권위주의 정권때가 더 높았다고 한다.

지난 8월 정부는 '과학기술혁신 5개년계획' 을 성안했는데 그 내용은 91년 12월 발표된 '과학기술혁신 종합대책' 의 재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나라의 앞날을 맡겠다는 사람들마저 경제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도, 국가 경쟁력의 핵심요소도 바로 과학기술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에 과학기술인들의 좌절감은 깊어지고 있다.

"그 많은 TV토론에서 과학기술 분야는 질문대상도 안되는 형편이니…. 야구나 봐야죠. " 이 지적을 놓고 보면 언론도 의제 (議題) 설정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래저래 박찬호팬은 늘어날 모양이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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