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내각제의 슬픈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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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생각해 보면 내각제는 우리나라에서 기구한 가시밭길만 걸어온 셈이다.

건국 당시 절대다수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면서도 이승만 (李承晩) 의 권력욕 때문에 좌절됐고, 4.19후엔 정착되기도 전에 5.16으로 무너졌다.

5공 말기에 전두환 (全斗煥) 정권의 내각제 시도가 있었으나 국민의 열화와 같은 직선제 요구로 무산됐고 6공초 3당통합을 하면서 내각제합의를 했지만 YS의 위약 (違約) 으로 역시 성사되지 못했다.

全씨는 집권당의 패배가 뻔한 직선제를 회피하면서 퇴임후에도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자는 기득권 연장책으로 내각제를 추진했고 盧씨 역시 퇴임후 보장책으로 내각제를 선호했던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처럼 내각제는 권력욕에 치이고 쿠데타로 밟혔으며, 국민지지를 못받은 추진주체와 순수하지 못한 추진동기로 인해 번번이 좌절돼 왔다.

대선 석달을 앞두고 정계에는 다시 내각제바람이 불고 있다.

국민회의는 자민련과의 합작을 얻어내기 위해 내각제를 받겠다고 나섰고, 신한국당도 심각한 지지율 열세 (劣勢) 의 탈출구로 외부연대용 내각제를 모색하고 있다.

이런 표면상 움직임으로만 보면 15대 국회말에는 어쩌면 내각제가 성사될 것 같기도 한 분위기다.

그러나 누구나 예감하는 것처럼 내각제의 가시밭길이 이번에도 끝나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번에도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내각제의 추진주체와 추진동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내각제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모두 내각제를 좋아하기 때문에, 또는 내각제가 우리나라에 더 적합하다는 애국적 판단에서 추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이 알다시피 DJ는 대통령제 지지자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이 되기 위한 방편으로 내각제를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신한국당은 바로 며칠전까지도 대통령중심제를 표방하고 개헌불가 (不可) 라고 외쳐온 정당이다.

이회창 (李會昌) 대표의 지지율 급락 (急落) 으로 다른 세력과의 연대를 끌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내각제를 이용하자는 것뿐이다.

따라서 JP를 제외한다면 내각제가 좋아서 내각제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술상 필요에서, 마지못해 내각제를 하자는 입장들일 뿐이다.

독력 (獨力) 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 아마 누구라도 내각제를 하자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각제는 또한번 적절한 추진주체와 순수한 추진동기를 만나지 못한 셈이고, 결과적으로 성사보다는 불발 (不發) 이 더 예감되는 것이다.

설사 내각제를 공약한 어떤 연합세력이 대선에서 승리하더라도 5년임기를 보장받은 막강한 대통령이 전술상 필요에서 마지못해 한 공약을 지킨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차일 피일 끌면서 자기 임기말에나 개헌을 하자고 해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정치인처럼 약속을 어기고 말 바꾸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아들에게도 못준다는 권력을 그리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키나 한 얘기인가.

내각제는 좋은 제도다.

대통령제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좋은 제도다.

그러나 이런 좋은 제도도 신중한 연구와 공론화과정을 거쳐 우리나라에 가장 적합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얻은 후 국민지지를 결집해야 채택이 가능할 것이다.

국가체제를 바꾸는 중대한 문제가 정치인들의 권력욕의 수단이나 집권의 임시방편으로 추진돼서도 안되고, 또 그런 식으론 성사될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각제에 관해 각정당이 그동안 무슨 연구를 얼마나 했으며 무슨 공론화과정을 거쳤다고 느닷없이 내각제인가. 내각제를 하자면서 이 세력 저 후보를 가리지 않고 총리를 주마, 당권 (黨權) 을 주마, 공동집권을 하자는 식으로 얄팍한 밀실흥정과 감투거래가 대선정국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정권을 잡으면 21세기 국운을 개척할 가장 유능한 팀을 짜야 할텐데 이미 밑천이 훤히 드러난 기성 정객들에게 이런 저런 요직을 미리 득표용으로 배정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바로 이런 정치행태가 우리나라에서 내각제를 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되고 있다.

내각제를 약자 (弱者) 의 생존전술이나 편의적인 집권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또 내각제가 정치세력의 야합이나 이합집산을 합리화해주는 명분이 될 수도 없다.

자기가 강하면 대통령제고 약하면 내각제라는 방식은 내각제를 더욱 멀게 할 뿐이다.

송진혁<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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