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돈 크레머 앙상블' 亞州순회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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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지난 16일 일본의 도쿄 (東京) 문화회관 대강당.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50)가 이끄는 탱고 앙상블의 아시아 순회공연의 막이 올랐다.

어두컴컴한 무대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면 더블베이스 주자 한명이 단순한 테마를 반복해서 연주한다.

이윽고 피아니스트, 반도네온 (남미식 아코디온) 주자, 바이올리니스트가 차례로 등장해 '영시 (零時) 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를 연주했다.

이들 주자들은 그후 단한번도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음악의 흐름을 깨지 않기 위해 중간 휴식시간도 생략했다.

프로그램 전체가 하나의 멋진 작품이었다.

이 대목에서 실전의 경험이 풍부한 기돈 크레머의 프로듀서적 기질도 한몫 톡톡히 했다.

우수가 감도는 반도네온의 음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대는 은은한 푸른빛 조명으로 탱고의 구슬픈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마지막 네번째 앙코르곡에서 연주자들은 초반부와는 반대로 한명씩 무대에서 사라졌다.

문득 하이든의 '고별교향곡' 이 떠올랐다.

마지막 음과 함께 크레머까지도 무대 출입문을 꽝하고 닫아버려 청중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전석매진에다 50.60대 청중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던 공연이었다.

이날 청중의 대부분은 주최측인 도민극장 (都民劇場) 소속 회원들. 일본에는 도민극장같은 자발적인 공연 관람객들로 조직된 아마추어 동호인 단체들이 직접 공연을 유치, 저렴한 가격으로 회원들에게 예술을 향수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지난해 가을 논서치 레이블로 탱고 앨범 '피아졸라 예찬' 을 내놓은 기돈 크레머는 2집 앨범 '엘 탱고' 의 출시에 맞춰 그의 탱고앙상블과 함께 일본.한국.대만 3개국 순회공연길에 올랐다.

한국공연은 오는 29일 오후7시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02 - 598 - 8277. 현재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뒷골목 음악이었던 탱고를 예술음악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탱고 누에보' 의 창시자 아스토르 피아졸라 (1921~92) 의 서거 5주기를 맞아 피아졸라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1백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을 발표한 바이올린의 거장 기돈 크레머까지 피아졸라에 흠뻑 빠진 이유는 값싼 상업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인간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던 피아졸라의 과감한 용기 때문이다.

피아졸라의 음악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르헨티나풍의 바흐' 에 가깝다.

마치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 를 연상하게 하는 화성진행, 그 위에 탱고 특유의 리듬이 교묘하게 얽혀 있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가냘픈 선율이 흔들거리다가도 타악기와 비슷한 음향이 격렬히 타오르면 무대는 금방이라도 장미빛 의상을 입은 무희 (舞姬)가 나타나 춤이라도 출 것만 같은 분위기다.

피아졸라가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기돈 크래머도 클래식과 탱고 사이에서 음악적 갈등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난 후 이튿날 숙소인 도쿄 다카나와 프린스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천재란 한 장르에만 속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에게 특정 음악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위험하다" 고 말했다.

여기서 '천재' 란 피아졸라와 크레머 자신을 가리키는 말임에 분명하다.

크레머는 또 내년초 피아졸라의 오페레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 를 녹음할 예정이며 당분간 피아졸라 연주와 레코딩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도쿄 =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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