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일수록 빛나는 가치, 골드러시 불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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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호 20면

금값이 말 그대로 ‘금값’이다.
7일 한국귀금속판매업중앙회에 따르면 순금(24K) 한 돈(3.75g)의 소매가격은 20만3000원이다. 지난달 사상 처음으로 20만원을 넘어섰다. 경기가 안 좋은데 값까지 치솟으면서 금 가공품 매기는 뚝 끊겼다. 서울 종로에서 귀금속 점포를 운영하는 라예골드 정인길 대표는 “금값이 비싸지면서 예물이나 돌반지를 사러 오는 손님이 거의 사라졌다”며 “장사가 되지 않아 임대료 내기조차 힘들다”고 말했다. 대신 금붙이를 팔러 나온 이들은 크게 늘었다. 명보쥬얼러 김선영 대표는 “손님 열 명 중 아홉은 금을 팔려고 온다”며 “경제가 힘들다 보니 금니처럼 작은 금붙이를 들고 와 문의하는 손님도 있다”고 말했다.

금의 귀환

국제 금값도 초강세다. 지난달 온스(31.1g)당 1000달러에 육박했던 금값은 현재 900달러 초반 수준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금은 지난해 3월 역대 최고인 온스당 1033.9달러까지 뛰었다가 금융위기로 돈줄이 궁해진 투자자들이 금을 내다 팔면서 지난해 11월 712.3달러까지 떨어졌다.

반면 몰리브덴·크롬 등 다른 희소 금속 가격은 오히려 약세다. 지난해 9월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 줄곧 내리막이다. 지난해 9월 ㎏당 4.9달러였던 크롬은 올 2월엔 1.8달러 선에서 거래됐다. 한국광물자원공사 신기흠 유통사업팀장은 “금 이외의 희소 금속은 산업용으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설명했다. 공장이 안 돌아가면 그만큼 수요가 줄어 가격이 내린다는 얘기다.

뛰는 금값은 새로운 골드러시를 만들어냈다. 금값 상승에 힘입어 미국 알래스카에서는 다시 금광 개발 붐이 일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알래스카주는 최근 네바다주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금을 많이 생산하는 지역으로 떠올랐다. 휴대전화 등 전자제품에 사용된 금을 재활용하는 ‘도심 속의 금광’ 사업도 각광받고 있다. 폐휴대전화 1t에서 금 400g이, 중고 PC 1t에서는 300g이 나온다.

금값은 왜 오를까. 우선 금융위기로 안전자산을 찾는 심리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평상시라면 은행 예금은 자산을 안전하게 보유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지금은 씨티은행 등 초거대 은행마저 흔들리는 상황이다. 내 돈의 안전을 은행에다 맡기기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대안으로 떠오른 게 금이다. 금값은 나쁜 뉴스에 오른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투자 수익이 높은 것도 매력이다. 세계적인 초저금리로 은행 예금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 예금금리는 이미 마이너스로 떨어진 지 오래다.

반면 금 투자는 경기의 호·불황에 관계없이 괜찮은 수익을 올릴 가능성이 크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강력한 금리인하 정책이 제대로 먹힌다면 경기는 살아나겠지만 인플레를 걱정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금 투자는 괜찮은 인플레 대응책이다. 통화정책의 약효가 미미하다면 주가와 주택 같은 자산 가격은 금보다 더 떨어질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금은 매력적인 투자 대안이 될 수 있다.

금 펀드나 금 통장(골드뱅킹)의 등장은 골드바를 사들일 거액이 없더라도 금 투자를 가능케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수익률도 과거처럼 괜찮을까.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2월 26일자)는 현재 화폐가치로 계산했을 때 이미 금값은 1972년 이후 지금까지의 평균치를 웃돌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아직은 더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을 내놨다. 지금 화폐가치로 계산할 때 80년 1월의 금값은 온스당 2300달러에 달했다는 것이다.

금값은 보통 달러가치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요즘은 달러와 금값이 함께 강세다. 하지만 달러 강세가 계속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금값이 오르고 달러가 떨어지면서 세계 경제가 불안해질 때마다 금이라는 실물에 튼튼하게 기반한 화폐(금본위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빙(宋鴻兵)은 중앙은행의 금 보유를 늘리고 금본위제에 기반한 세계 통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내놨다.

반면 10여 년 전 이코노미스트(97년 11월 22일자)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보고서를 인용해 각국 중앙은행의 금 보유량을 줄이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는 아시아 외환위기에도 금값이 약세였다. 중앙은행들이 금을 팔아 금 보유량을 줄였기 때문이다. 이 잡지는 돈을 마구 찍어내지 않는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금본위제 혹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중앙은행의 금 보유 확대를 반대했다.

되레 중앙은행의 금 보유를 줄이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금을 더 캐내지 않아도 기존 금을 풀어 산업용 수요를 충당할 수 있어 경제적으로 더 이득이라는 것이었다. 괜히 금을 찾아 땅을 파지 않아도 되니까 환경에도 좋다. 금은 있으나 없으나, 많든 적든 이래저래 인간에겐 ‘귀하신 몸’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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