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가치냐 외환보유액이냐 … 정부의 선택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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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뉴스분석 4일은 외환 당국 관계자들에게 기분 좋은 날이었다. 전날처럼 달러를 대량으로 내다팔지 않았는데도 원화가치가 안정을 찾았다. 장 초반 달러당 1578.5원까지 내렸던 원화가치는 주가 상승에 힘입어 1551원으로 오른 채 마감했다. 우리은행 박상철 과장은 “눈에 띄는 개입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시장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날도 거래 규모는 36억 달러에 불과했고, 달러당 원화가치는 하루 새 43원(1578.5원~1535.3원)이나 움직였다. 거래량이 작고, 원화가치 변동폭이 큰 것은 최근 서울 외환시장의 패턴이 돼버렸다. 이런 시장에는 투기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이미 역외의 투기세력들이 상당 규모로 가세해 원화가치 하락에 베팅하고 있다는 것이 시장의 평가다.

윤증현 경제팀은 외환시장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자제력을 보여왔다. 시장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정책기조를 유지하면서 2000억 달러를 간신히 넘는 외환보유액을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원화가치가 달러당 1600원에 근접하면서 당국의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당국은 2일과 3일 ‘무력시위’를 했다. 이틀간 약 15억 달러를 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환 당국 입장에선 원화가치 급락을 방치하기 어렵다. 수출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으나 수입물가가 오르면서 전체 물가를 불안하게 하고, 달러가 필요한 수입업체와 기러기 아빠들의 비명이 커지기 때문이다. 원화 값이 자꾸 떨어지는 것 자체가 외국인들의 이탈을 부채질해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만든다.

문제는 앞으로다. 시장 여건은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미국의 금융불안과 동유럽 위기의 파장이 조금씩 확대되면서 국제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한 시중은행 외환딜러는 “잠시 쉬어가는 것일 뿐 원화가치 하락 쪽으로 치우쳐 있는 시장 분위기가 바뀐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외환 당국은 선택을 해야 한다. 당장 원화가치를 붙잡을 것이냐, ‘곳간의 달러(외환보유액)’를 지킬 것이냐다. 둘 다 할 수는 없다.

전문가들 사이엔 개입을 가급적 자제하고 외환보유액을 아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당국이 달러를 푼다고 해서 쉽사리 바뀔 상황이 아니다. 달러 강세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고 우리 시장에도 달러 수요가 줄을 서 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글로벌 시장의 불안이 해소되지 않으면 우리 외환시장이 안정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게다가 지금처럼 환투기세력이 달라붙은 상황에서 당국의 달러매도 개입은 투기꾼들의 배만 불리기 십상이다(전민규 한국투자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 무엇보다 비상시에 대비하려면 외환보유액이 넉넉해야 한다. 예컨대 국제 차입 시장이 얼어붙으면 은행들이 기댈 곳은 외환보유액밖에 없다.

곳간을 지키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원화 약세가 가져올 물가 상승과 소비 감소를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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