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를 다룬 영화·드라마 폭발적 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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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한 사나이가 있다.

재산이라고는 달랑 '그것 두쪽' 에 불과하지만 주먹 하나만큼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배운 것도, 아는 것도 없지만 우정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

시시껄렁하게 시작되는 어떤 삶. 우연히 주먹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 붕괴되는 위기의 순간, 그는 정의의 사도로 바뀐다.

죽음 직전의 보스를 구하는 것으로 일약 스타덤 - . 어디선가 본 장면 같다고? 아는 사람 같다고? 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박중훈.한석규.최민수.박상민.손창민 그리고 조양은과 겹쳐진다고? 정답이다.

깡패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인기다.

'넘버3' '현상수배' '깡패수업' '초록 물고기' 등 영화에서 '내가 사는 이유' '영웅반란' '욕망의 바다' 등 TV연속극까지… 폭력신화를 다룬 작품들이 쏟아진다.

우리 사회에 깡패들이 많아서? 그럴 리가! '지존파' '막가파' 때문에? 동네에서 잘 나간다는 아이들이 만든 '일진회' '회오리파' 가 밤마다 설쳐서일까? 혹시 '모래시계' 망령은? 글쎄…. 그게 아니라면 깡패세계의 규율이 그리워서일까. 논리보다는 힘이 앞서고,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 '까라면 깐다' 식의 상명하복이 철저히 지켜지는 그런 세계에 대한 동경 (憧憬) 같은 것.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정치판.기업할 것 없이 우리 사회란 게 그런 규율에 젖어 있는 것 아닌가.

차라리 영화에 나오는 깡패들은 불쌍한 축에 속한다.

가난한 집에서 난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세파를 헤쳐 나오기 일쑤다.

꿈이라곤 조그마한 집에서 부모.마누라.자식과 함께 도란도란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 점은 우리들 소시민의 삶과 통하는 구석이다.

하지만 깡패들은 우리들과 다르다.

그들은 세상을 향한 정면돌파에 길들여져 있다.

'보스' 의 조양은처럼 수십명과 주먹 하나로 맞서기도 하며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얻어맞더라도 '넘버3' 의 태주 (한석규) 와 같이 배신은 하지 않는다.

'초록 물고기' 의 막동이 (한석규) 처럼 구차하게 사느니 '한건' 을 해치우고 죽음을 택한다.

가슴을 졸이며, 때론 주먹을 쥐며… 어느새 우리는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태주와 양은이와 막동이가 된다.

첨단.문화.문명.합리라는 이름의 폭력에 억눌렸던 '원초적 폭력' 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리는 것이다.

부활한 폭력 본능은 연약함을 지혜로, 비겁함을 현명함으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진 소시민의 '가면' 을 벗기고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국산영화를 외면하는 사람들조차도 '깡패 영화' 엔 솔깃하다.

그래서 영화.드라마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폭력은 더 잔인해지고, 생생해지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 '깡패' 는 인기를 끌 것이다.

그러나 깡패를 통한 대리만족으로 우리네 굽은 허리를 펴고 얼마나 당당해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영화관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일상의 껍데기가 물러가고 정의와 양심이 부활한다.

하지만 잠시 그뿐이다.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어깨와 주먹에 맺혀있던 힘이 저절로 풀리는 것을 느낀다.

허전하다.

허무하다.

그래서 다시 발길을 묘한 소굴로 되돌린다.

만일 그게 습관이 되면 어쩌지?

문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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