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뺨 때리고 양말 벗고 … 68시간7분 “혈안 영화광 만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대회 사흘째인 지난달 26일 서울 왕십리 CGV 극장에서 ‘제1회 영화 오래 보기 대회’에 참석한 도전자들이 영화를 보고 있다. 5초만 눈을 감아도 탈락되는 규율 앞에서 비몽사몽 잠과 싸우는 열혈 영화광들의 얼굴이 안쓰럽다. [CGV 제공]


영화 오래 보기 한국 기록은 66시간41분. 무려 사흘을 한 자리에서 영화만 봤다는 얘기다. 이러니 독하지 않고서야 도전에 섣불리 나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신청자가 무려 4만5000여 명에 달했다. 지난달 24일 오전 133대 1의 경쟁률을 뚫은 239명이 서울 왕십리 CGV 극장에 자리를 잡았다. 달콤한 잠을 영화와 맞바꾼 도전자들. 그 무한 도전에 동참해 보기로 했다.

#2월 24일 정오 ‘좋은 놈, 나쁜 놈 …’

오전 8시30분, 행사장은 전국에서 몰려든 ‘불면의 달인’들로 북적였다. 아예 운동복 차림에 수건까지 휘감고 나타난 도전자도 적잖았다. 밤을 새우려면 간편한 옷차림은 필수일 터. 청바지 차림에 코트를 걸친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어 혈압 측정 등 신체검사가 진행됐다. 주최 측은 “최종 우승자는 약물 검사도 실시하니 주의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대회의 규칙은 이랬다. 영화 한 편이 끝나면 5분 휴식, 3편이 끝난 뒤엔 15분을 쉬고 음식도 제공된다. 5초 이상 눈을 감으면 탈락이다. 영화 상영 도중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속삭여서도 안 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고 벌떡 일어났다간 당장 퇴장이다. 25대의 캠코더가 도전자들의 얼굴을 찍고, 200명의 감시요원이 번갈아가며 감시한다. 이쯤 되면 수용소가 따로 없다. 주최 측은 40여 편의 한국영화를 연속 상영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영화는 무한정 틀어드릴 테니 당신의 잠과 자유를 반납하시죠’.

드디어 정오. 대형 타이머가 돌면서 첫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시작됐다. 그런데 웬걸, 54분52초 만에 첫 탈락자가 나왔다. 이 도전자는 감시요원의 손에 이끌려 나가면서 “그놈의 감기약 때문에….”라고 말했다고 한다. 혼자서 중얼댔다. “조는 놈, 눈감는 놈, 꾸벅이는 놈이 되지 말자.”

#24일 저녁 6시38분 ‘순정만화’

영화 3편 상영이 끝나면서 처음으로 15분간 휴식이 주어졌지만 저녁 식사에 용변까지 해결하기엔 빠듯했다.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밥은 좀 편하게 먹게 해달라”는 등 불만이 터졌지만 주최 측은 “휴식시간을 넘기면 실격”이라는 원칙만 되풀이했다.

계단 난간에서 허겁지겁 밥을 삼키다가 한 도전자에게 물었다. “뭐가 제일 힘들어요?” “봤던 영화를 또 보려니 졸음이 쏟아지던데요.”(대학생 성아영씨) 그랬다. 가뜩이나 졸리는데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보려니 고역이었다. 4번째 영화 ‘순정만화’가 시작됐다. 스크린에선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가 흘러나오는데 눈가엔 스멀스멀 졸음이 번졌다. 순정 만화보단 코믹 만화에 가까운 풍경.

#25일 새벽 3시50분 ‘마지막 선물’

새벽 무렵 고비가 찾아왔다. 무작정 쏟아지는 졸음에 속수무책이었다. 양손으로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잠시 눈이 번쩍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궁리 끝에 양말을 벗어 던졌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 미안한 말이지만 맨발이 주는 상쾌함에 고비를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곳곳에서 졸음과의 사투가 벌어졌다. 한 도전자는 마스크팩을 꺼냈다가 규칙 위반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보다 멋진 선물이 있을까요.” 최고령 도전자인 권복순(47)씨의 말이다. ‘그래, 이 도전이 지친 스스로에게 선물로 값할 수만 있다면’. 스크린에선 9번째 영화 ‘마지막 선물’이 차르르 돌아가기 시작했다.

#25일 오전 10시25분 ‘슈퍼맨 …’

어느새 11번째 영화다. 대회 시작 후 18시간에서 22시간 사이 69명이 대거 탈락했다. 온몸의 기운이 줄줄 새나가는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스크린에선 배우 황정민이 “나는 슈퍼맨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당신은 슈퍼맨이 아니란 말이에요”란 전지현의 목소리도 들은 듯싶다. 그러곤 모르겠다. 한 감시요원이 건넨 말만 선명할 뿐. “탈락입니다.” 자다 깨다 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 모양이다. 22시간21분. 영화와의 무제한 데이트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27일 오전 8시7분 ‘에필로그’

27일 오전 8시7분쯤 이상훈(26)·이수민(28)씨가 공동 우승자로 확정됐다. 35번째 영화 ‘기방난동사건’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두 도전자는 “더 이상 강행할 경우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의료진의 진단을 받아들여 도전을 스스로 중단했다. 그러나 막상 시상식장에 들어선 이들 ‘영화 남녀’는 눈만 살짝 충혈됐을 뿐 팔팔했다. 인터뷰에 응하는 목소리도 가뿐했다.

“재미삼아 도전했는데 하다 보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이상훈씨) “세계 기록(70시간33분)을 깨고 싶었는데 심장 박동이 갑자기 빨라지는 것 같아서 그만뒀어요.”(이수민씨) 이들에겐 상금 250만원씩이 주어졌다. 68시간7분. 시간의 잔인함을 견뎌낸 젊은이들이 한국 신기록을 수립한 순간이었다.

정강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