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48>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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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16면

1993년 삼성 이건희 회장이 혁신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이야기는 당시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회사가 끊임없는 개혁을 추진한 결과 세계 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건 다 아는 이야기다. 프로골퍼들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선수가 있다. PGA투어에서 10년째를 맞는 최경주다.

최경주의 변신은 무죄

최경주가 또 바꿨다. 이번엔 아이언 샤프트를 ‘스틸’에서 ‘그라파이트(graphite)’로 교체했다. 지난주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베에라 골프장에서 열린 PGA투어 노던 트러스트 오픈. 최경주의 아이언엔 반짝거리던 스틸 대신 짙은 회색 그라파이트 샤프트가 끼워져 있었다. 샤프트를 바꾼 덕분인지 그린 적중률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140명이 넘는 출전 선수 가운데 4위(72%)를 기록했다. 시즌 첫 톱10에 오른 것도 정교한 아이언샷 덕분이었다.

최경주가 클럽을 바꾼 게 처음은 아니다. 스틸 샤프트를 줄곧 애용하던 최경주는 2002년 국내 기업이 만든 그라파이트 샤프트로 교체해 눈길을 끌었다. 이른바 ‘오렌지 샤프트’였다. 한동안 이 클럽을 들고 승승장구하던 최경주는 2006년엔 다시 스틸 샤프트로 돌아간다. 여러 가지 다양한 샷을 구사하기에 스틸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3년 만에 다시 가볍고 컨트롤하기 쉬운 그라파이트로 돌아온 것이다.

스틸이 아닌 그라파이트 아이언을 사용하는 남자 프로골퍼는 많지 않다. 그라파이트는 스틸 샤프트에 비해 가볍지만 러프에서 샷이 쉽지 않은 데다 샤프트에 따라 편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PGA투어 정상급 골퍼들은 페어웨이 우드와 드라이버엔 그라파이트를 쓰지만 아이언엔 대부분 스틸 샤프트를 끼운다. 그렇지만 최경주는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한번 변화를 선택했다.

최경주에게 ‘변화’는 생존을 위한 고육책이다. 힘 좋고 젊은 선수들이 치고 올라오는 PGA투어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신중하게 판단한 뒤 ‘이거다’ 싶으면 과감하게 변신을 시도한다. 드라이버와 퍼터도 수시로 바꾼다. 적어도 골프용품에 관한 한 그는 얼리 어답터다. 변덕스럽다는 평도 듣지만 개의치 않는다. 일단 바꾼 뒤엔 믿음을 갖고 밀어붙인다.

“참치 캔 따는 소리가 난다”고 비웃음을 샀던 사각형 헤드 드라이버를 애용하는 것도 도전정신의 산물이다. 다른 선수들이 꺼리는 두툼한 홍두깨 퍼팅 그립(일반 그립보다 두 배 정도 두툼한 퍼팅 그립)을 실전에 과감하게 도입한 것도 최경주다. PGA투어에서 이런 그립을 사용하는 선수는 최경주뿐이다.

최경주의 변화는 클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해엔 나이 마흔이 되자 느닷없이 체중 감량에 나서기도 했다(최경주는 1970년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68년생이다). 스코어만 줄일 수 있다면 가족 빼고는 모든 걸 바꾸겠다는 각오다. 물론 그가 언제 다시 샤프트를 바꿀지 알 수 없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기업 경영도 골프도 마찬가지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는 2009년, 최경주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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