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 나는 ‘별다방’에서 인생을 배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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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삶의 추락은 예고 없이 다가온다. 커다란 파도가 닥치면서 익숙한 일상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그때, 당신은 새로운 삶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갈 수 있는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미국의 한 늙은 백인 남자의 감동적인 대답이다.

‘뉴요커’ 지 칼럼니스트이자 작가로 이름을 날린 아버지와 명문가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저자 마이클 게이츠 길(64)은 맨해튼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랐다. 예일대를 졸업한 뒤 세계 굴지의 광고회사인 제이월터톰슨(JWT)의 광고제작 이사까지 승승장구하며 평온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온 그에게 ‘추락’은 전혀 남의 얘기인 듯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해고와 불장난 같았던 불륜이 이혼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월세를 걱정하는 무일푼 신세가 된 그는 3월의 어느 비 오는 날, 안락한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때 살던 동네의 스타벅스에서 라테를 마시는 마지막 호사를 누린다. 운명이었을까, 그에게 구명 밧줄이 던져졌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스타벅스의 매니저인 크리스털 톰슨이 “여기서 일할 생각이 없냐”며 말을 걸어 온 것이다. 천만 명 중 한 명 꼴로 발병한다는 ‘청각신경종양’ 으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 그는 스타벅스가 직원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제공한다는 설명을 듣고 일할 마음을 굳힌다. 그렇지만 채용 연락은 빨리 오지 않았다. 마이클이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만큼이나, 매니저 입장에서는 인텔리의 늙은 백인 남성을 점원으로 채용하는 것도 고민스러운 사안이었을 테니.

일자리는 생겼지만 저자는 순간 순간 낯선 세계로 뛰어들어야 하는 두려움과 참담함에 흔들린다. 그는 스타벅스에 출근하던 첫날의 아침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현재 직업이 없다. 직업을 구하고 있다. 나는 돈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또 성적 본능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이 지경까지 왔다는 잔인한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이제 새로운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일자리를 구하기에 너무 늙어버린 지금, 내가 맞닥뜨린 현실은 자기 몸 하나 부양할 능력도 없고, 그 어떤 회사에서도 반겨주지 않는 미국 노인들이 처한 잔인한 현실 바로 그것이었다. 불안하고 암담하고 창피했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스타벅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매장에 들어선 그는 더욱더 절망한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너무나 힘든 작업일지도 모른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다음날의 출근길. 예순이 넘은 노인은 “(출근길에 만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자신감에 질투가 났다. 출근길이 완전히 몸에 익어 보이는 그들의 여유가 야속했다”며 눈물을 쏟는다.

하지만 그는 무릎 꿇지 않는다. 가끔씩 과거로 회귀를 꿈꾸는 자신을 향해 “과거는 짧게, 미래는 길게”라고 되뇌면서. 그리고 천천히 최선을 다해 그동안 그를 가뒀던 삶에서 벗어나 겸손을 배우며,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몸으로 익힌다. 그는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화장실 청소에 열을 올리고 쓰레기 봉투를 나르며 주문 받기와 계산하기, 개점과 영업 마감, 커피 만들기까지 하나씩 해내면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그는 “스타벅스는 공허한 상징물만 쫓아다니던 허영심으로부터, 두려움만 가득했던 피상적인 삶을 살면서 느껴야 했던 불안감으로부터 나를 구해줬다”고 고백한다. 그는 “가슴을 따르라”는 톰슨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우리 삶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며 나는 그걸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고 말한다.

책의 미덕은 마이클이 스타벅스의 바리스터로 거듭나는 모습만을 그리는 데 있지 않다. 그가 25년간 JWT에서 일해온 시간의 힘이 스타벅스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그가 발휘하는 능력의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광고회사에서 글쓰기 실력을 발휘하던 저자의 재능이 발휘된 것인지 책의 구성도 탄탄하다. 거기다 덤으로 재클린 케네디와 헤밍웨이, 무하마드 알리 등 유명인과 저자와의 개인적인 추억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원제『How Starbucks Saved My Life』.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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