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풀리지 않는 사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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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진이 늘 사건을 척척 풀어내는 것은 아니다. 미궁에 빠진 사건도 상당수다. 수사기관은 남편을 유력한 용의자로 봤으나, 지난해 최종 무죄 판결이 나와 결국 범인은 오리무중이 된 '치과의사 모녀 피살 사건'이 한 예다.

이보다 훨씬 앞서 약 40년 전에도 추리와 과학을 총동원했으나 범인을 못 밝힌 사건이 있었다. 그때라고 해서 추리와 분석이 요즘보다 크게 뒤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 치과의사 모녀 피살

1995년 6월.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30대 주부와 한살배기 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시신은 물이 담긴 욕조에 떠 있었다. 범인은 현장을 은폐하려고 장롱에 불까지 질렀다. 수사진은 남편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날 출근 전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현장에 경찰이 다다른 시간(오전 10시)에 시신이 굳은 정도 등으로 미루어 '출근 시간 이전에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법정에서 변호인은 사망 시간 추정을 문제로 들었다. 따뜻한 물에 잠기면 시신이 더 빨리 굳을 수 있다는 점을 수사진이 간과했다는 것이다. 시신이 빨리 굳었다면 실제 사망 시간은 수사진의 추정보다 나중, 그러니까 남편이 출근하고 난 뒤에 살해됐을 수 있다.

화재도 문제였다. 이웃이 연기를 본 것은 남편이 출근하고 두시간 뒤. 실제 세트를 만들어 실험한 결과, 장롱에 불을 지르면 즉시 집 밖으로 연기가 났다. 이에 앞서 검찰은 컴퓨터 분석(시뮬레이션) 자료를 들어 불을 지르고 두 시간이 지나서야 연기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법정은 변호사의 논리에 손을 들어줬다.

*** 충무로 살인

“1967년인가, 서울 충무로였어. 양장점 여직원이 변사체로 발견된 게 자정을 조금 지나서였지.”

40년 가까이 지났건만 국내 법의학계의 태두인 문국진(79) 고려대 명예교수는 시간까지 기억했다. 당시 그는 국과수 법의학 과장이었다.

시신의 몸엔 칼자국이 있었다. 범인의 손이 피범벅이 됐을 위치였다. 유력한 용의자는 애인. 소지품에서 피묻은 손수건이 나왔다. 다그치자 “입맞춤하다 둘 다 입술에서 피가 나 손수건으로 닦았다”고 했다. 혈액형 검사 결과 진짜로 손수건에서는 두사람 모두의 피가 나왔다.

이번엔 사망자의 피가 남아 있을 법한 손톱을 조사했다. 극미량이 있었다. 용의자는 “1주일 전 고향에서 노루피를 마시다 묻었을 것”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손톱의 피는 사람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가릴 만큼 충분치 않았다.

궁리 끝에 아이디어가 나왔다. “피가 묻은 뒤 1주일이 지났으니 머리를 감았을 텐데, 그러면 손톱에 피가 남았을 리 없다.”실제 경찰이 손에 피를 묻히고 머리를 감았다. 손톱에 조금의 혈흔도 남지 않았다. 이를 들이밀고 추궁했다. 곰곰히 생각하던 용의자가 말했다. “코피를 잘 흘려서 얼마 전에 손으로 코피를 닦은 적이 있는데….”실제 그는 비염을 앓아 코피를 자주 쏟았다.

문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범인이면 둘러대는 게 그렇게 잘 맞을 수 있나. 풀려났지. 잘 된 일이야. 범인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도 법의학의 의무니까.”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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