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법치주의 망각한 사법개혁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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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대법원은 누구든 대법관 후보를 추천할 수 있고, 그 후보들을 심의할 대법관 제청자문기구에 시민대표 3명까지 참여시키자는 사법개혁위원회의 건의를 수용할 방침이라고 한다. 이는 대법관 제청의 인사제도를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이라고 비판했던 지난해 8월 이른바 제4차 사법파동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사법개혁의 시동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사법개혁이 이처럼 대법관 인선과정의 개선에서 출발한다는 것 자체가 사법개혁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볼 수 없다. 더군다나 법조인끼리만의 후보 추천이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것이라고 비난받아야 했던 대법관 선임과정에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개혁에 대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시민단체가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한다는 것은 사법개혁의 본질을 흐리게 할 개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사법개혁은 사법부의 독립을 원천적으로 훼손할 개연성이 높은 위험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사법개혁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중요한 과업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사법개혁은 정치와 행정 등 다른 분야의 개혁과 같은 차원에서 왈가왈부하고 접근해서는 안 될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이 있음을 정부는 물론 국민도 인식해야 한다. 사법영역에는 개혁 만능이라는 시대의 물결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과 기본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헌법이 규정한 사법부의 독립과 사법부의 책무다. 사법부는 헌법과 법률의 유권적 해석 적용, 즉 법치주의 실현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력남용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사법개혁의 초점은 바로 사법부가 법치주의의 보루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사법부의 독립된 지위와 권한이 더욱 확고해지고, 사법부가 짊어지고 있는 법치주의 실현의 책무를 다할 수 있는 방향으로 환경을 조성.강화하는 것이 사법개혁의 본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래 법치주의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사법부의 존재가치와 책무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해 엉뚱한 사법개혁을 주장하는 의견이 이어지는 데는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일부 목소리 큰 단체들이 선거법 위반 등 특정 사안에 대한 법원의 판결에 대해 공공연하게 불복종을 외치면서 '반개혁적 법원'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경우가 그런 예다.

헌법의 정신과 법률에 따라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법관의 판단을 두고 자신들의 주장과 맞지 않는다고 '반개혁적'이라고 비난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들자는 얘기와 다름없다. 헌법과 법률은 이미 제도화된 국민적 합의이자 합의된 국익 또는 공익(public good)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법부는 그 틀 안에서 구체적 정의가 무엇인지를 판단하게끔 제도화되어 있다. 따라서 헌법과 법률의 올바른 해석 적용이야말로 '합의된 국민의 뜻'에 따른 법 운영이며 국민을 위한 사법행위인 것이다. 법관에게 새롭고 혁신적인 판결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비난해서도 안 되는 이유다. 사법부가 헌법체제 수호의 마지막 보루가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법관은 국민의 뜻을 다만 헌법과 법률에서 찾을 따름이다. 그에 따른 판결이 불만이어서 사법개혁을 외친다면 그것은 견강부회이자 자가당착일 뿐이다. 사법개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국회에 법률개정을 요구해야 하는 사안이다. 각종 이익단체나 시민단체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해를 국민의 의사라고 포장해 그것을 잣대로 사법부와 법관을 개혁대상으로 삼으려 든다면 사법부의 독립은 설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사법개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를 죽이는 길이다.

사법부도 스스로 독립을 지키고 그 책무를 다하기 위해 자기 정화와 개혁에 더욱 매진함으로써 부당한 형태의 사법개혁 요구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 신뢰를 되찾아 다지는 일은 사법부의 가장 우선적인 과제다. 그래야만 사법개혁이 사법부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김인섭 법무법인 태평양 명예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