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부 법 개정 착수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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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한국은 인구 100만 명당 뇌사자 장기 기증자가 3.1명이다. 스페인(35.1명)이나 미국(25.5명), 프랑스(22.1명)에 비해 상당히 적다. 국민 인식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제도적 이유도 있다.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2000년 2월 뇌사를 합법화했다. 장기 기증을 전제로 했을 때만 인정했다. 이때부터 장기 기증이 정부 통제로 들어갔다.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를 만들어 거기서 장기 이식의 순서와 절차를 일일이 통제했다. 장기를 둘러싼 음성적 거래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엉뚱한 결과를 가져 왔다. 1999년 162명에 달하던 뇌사자가 2000년 52명으로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전에는 큰 병원들이 뇌사를 판정했고 장기 이식도 알아서 했다. 교통사고 등으로 뇌사자가 생기면 병원들이 가족들에게 장기 기증을 적극적으로 권해 자기 병원에서 이식 수술을 했다. 하지만 정부가 통제하면서 일일이 대기 번호를 매기자 뇌사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장기는 살아 있는 사람(생체)과 뇌사자가 공급한다. 생체이식할 수 있는 장기는 신장이나 간 등 일부에 한정돼 있다. 생체 기증자도 그리 많지 않다. 장기 이식의 주 공급원은 뇌사자다. 제도 도입 첫해 크게 줄었던 뇌사 기증자는 이후 매년 조금씩 늘었지만 수요를 따르지 못했다. 이식 대기자가 줄을 이었고, 이식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신장 이식 대기자만 7641명에 달한다. 국내에서 이식 받지 못한 환자들은 거액을 들여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 이식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뇌사 판정 절차와 조건을 완화하자는 주장이 2000년 법률 제정 당시부터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 일부 조항만 살짝 바뀌었을 뿐 핵심 조항은 9년 이상 유지돼 왔다.

뇌사자가 사전에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혔더라도 가족이 반대하면 장기 이식을 할 수 없다. 자식들이 부모의 신체 훼손을 우려해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뇌사판정위원회를 거치도록 한 규정도 비판을 받아 왔다. 뇌사자는 교통사고 환자가 가장 많다. 밤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위원 과반수인 위원회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장기가 훼손돼 막상 뇌사 판정을 해도 쓸 수가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계명대 동산의료원이 2007년 5~10월 이 의료원에서 발생한 잠재적 뇌사자 47명을 조사한 결과 11명만 실제로 장기 이식이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유족 반대(12명)나 기준 요건 미달(15명) 탓이 컸다. 9명은 기증 의사가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뇌사 판정까지 시간이 걸려 장기가 이미 이식에 부적합해 폐기됐다.

한나라당 이애주 의원은 “스페인·미국 등 뇌사자 장기 기증이 많은 나라들은 유족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본인의 사전 기증 의사만 확인하면 뇌사자의 장기를 기증할 수 있고 뇌사판정위원회 없이 전문의의 판단만으로 뇌사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신현호 변호사는 “법 도입 당시부터 너무 엄격하게 적용한 측면이 있다”며 “국내 의료진의 높은 윤리 수준이나 국민들의 생명윤리 수준을 감안할 때 제도 완화가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안혜리 기자

◆뇌사=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의 뇌사 판정 기준 및 절차에 따라 뇌 전체 기능이 되살아날 수 없는 상태로 판정된 경우를 말한다. 심장이 멎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심장·간장·신장 등 체내 모든 장기를 이식할 수 있다. 심장이 뛰고 의식이 있는 식물인간과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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