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컨설팅'으로 한국영화살린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한국영화 전용관?

연중 상영일의 5분의 2는 한국영화를 틀어야 한다는 스크린 쿼터도 눈엣가시 같은데, 3백65일 내내 한국영화만 틀라고?

자, 당신이 한국영화 의무상영제에 감정이 많은 극장주라 하더라도 잠깐 흥분을 가라앉히시길. "한국영화 많이 틀면 금전적으로 손해란 생각은 틀린 겁니다.

'투캅스' '은행나무침대' 같은 흥행작이 꾸준히 나오지 않습니까. 또 한국영화 상영분에 대해서는 6천원당 3백66원꼴인 문예진흥기금을 돌려받을 수도 있구요. 이 경우 수익면에서 대략 연중 2만~2만5천명의 관객이 더 드는 것과 같죠. 게다가 한국영화 전용관으로는 '최초' 아닙니까. 기사를 통해 선전이 될 겁니다.

그만큼 극장 이미지도 좋아지구요. 어차피 연간 1백46일은 한국영화를 틀어야 하는 것, 조금만 더 쓴다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 어떤가, 귀가 좀 솔깃해지지 않나. 실제로 한 극장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낡은 시설을 전면 수리해 블루.레드.그린의 3개 복합 상영관으로 재개관을 준비 중이던 허리우드극장. 지난 6월28일은 그 중 블루관을 국내 최초의 한국영화 전용관으로 해 허리우드가 새롭게 문을 연 날이자, '극장 컨설팅' 이란 신업종에 뛰어든 김광수 (32).이은정 (30) 팀이 첫 고객과 성공적인 출발을 한 날이기도 하다.

극장 컨설팅?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영화제작소 '청년' 에서 단편영화 작업을 하던 김광수씨가 극장으로 눈을 돌린 것은 2년전. 지금은 어엿한 '예술영화 전용관' 으로 자리잡은 동숭시네마텍에 취직한 것이 계기였다.

"좋은 영화를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보여주느냐도 중요하다" 고 역설하는 극장주의 성원에 힘입어, 영화판에서 흔히 '반구미 (番組, 프로그램이란 뜻)' 라고 부르는 영화수급뿐 아니라 적극적인 영화관련 행사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은정씨와 팀을 이뤄 기획한 일들은 예술영화의 주요 관객인 매니어들의 구미에 딱딱 맞았다.

미국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컬트영화 '이레이저 헤드' 의 자정 (子正) 시사회, 영화 교과서에는 빠짐없이 실리지만 여간해서는 볼 기회가 없는 스웨덴 감독 잉그마르 베리만 영화제…. 버스와 지하철이 끊기는 시각도 마다않는 매니어들 덕에 행사는 매번 성공이었다.

이때 생긴 의문 하나. 왜 한국영화에는 매니어들이 없을까.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각각 개인사정으로 동숭시네마텍을 그만두고 영화사 '알앤아이' 로 옮긴 이들의 기획안을 허리우드극장에서 채택한 것이다.

극장측은 일단 재개관에 대한 홍보가 필요했고, 극장주가 제작도 겸하는 덕에 한국영화 전용관 구상에도 흔쾌히 동의했다.

돼지머리 즐비한 골목을 지나, 70년대풍 낙원상가로 들어서면 말끔히 단장한 극장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으로 이들은 광고보다 '입 선전' 을 택했다.

무료시사회를 수차례 개최, 많은 사람이 일단 극장에 와보도록 한 것. 물론 그냥 시사회는 아니다.

미국영화 '맨 인 블랙' 의 경우 '블랙 (검정) 의상을 입은 사람은 무료' 라고 내걸었고, 그날 극장안은 안경테에서 신발까지 까만색으로 도배한 젊은이들로 가득찼단다.

공포영화만 줄줄이 상영하는 '호러 (horror) 영화제' 마지막 날 역시 진풍경을 연출했다.

네편의 외국영화와 한차례 강의가 이어진 토요일밤 11시부터 일요일 아침 8시까지, 7백여명의 관객이 자리를 지킨 것이다.

본래 심야상영은 법에 어긋나지만 '영업이 아니라 문화행사' 라고 관할 관청을 설득했다나. 이들의 기획력과 추진력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밤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은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도 '열혈 영화청년' 이라는 것. 이후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