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칼럼 책에 길을 묻다] 한국 가톨릭은 왜 힘이 셀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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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제헌국회 개원은 건국이 코앞이던 1948년 5월31일의 일이다. 초대의장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하늘의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부터 청했다. 지목 받은 이는 제헌의원 이윤영 목사. 일정에 없던 제안, 어리둥절하면서도 엄숙한 첫 기도가 그때 올려졌다. 그 장면을 유심히 방청했던 14살 중학생도 퍼뜩 “이건 좀 난데없네?” 싶었는데, 그 소년이 훗날의 언론인 김진현이다.

그가 『일본의 친구들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란 책에서 새삼 환기시켜줬던 이 일화는 새겨볼 수록 절묘하다. 한국 기독교의 특징이 너무도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승만은 기독교 국가를 꿈꿨다. 기독교 인구 10% 미만이던 그때 군목(軍牧)도 도입했는데, 이게 종교적 독단이었을까? 봉건 잔재 청산을 위해서라도 기독교 개혁세력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을 반영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 성공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양반·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

왕정 폐지론자 이승만이 미 유학에서 돌아온 1910년 토해냈던 발언도 그걸 뒷받침한다. 당시 개신교·가톨릭은 새 나라, 새 민족 건설을 향한 민중의 염원을 반영했다. 백범 김구도 동학 접주(接主) 출신. 하지만 27세에 개종을 결심, 영세 받았다. 한·중·일의 기독교 수용도 크게 달랐는데, 사회개혁적 기독교가 근대한국의 특징이라는 게 ‘동양사의 총통’ 고(故) 민두기 교수의 말(『시간과의 경쟁』)이다. 일테면 청나라 말 중국 땅에서 기독교 인사로 사회개혁에 나섰던 인사는 전무했다. 우리와는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일 것이다. 1910년 벌써 조선의 신자는 22만6000명으로, 중국(20만7000명)·일본(8만7000명)을 눌렀다. 당시 평양에서 일요예배에 모이는 인구는 1만4000명. 시내 인구의 3분의 1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한국은 기독교가 초강세인데,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다이내믹 코리아를 뒷받침하는 에너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2005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한국의 종교분포는 불교 22.8%, 개신교 18.3%, 가톨릭 10.9%의 순이다.

이중 가톨릭의 급신장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데, 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후광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가톨릭은 60년대 이래 종교의 위엄과 사회적 책무라는 균형 잡기에 놀랍도록 성공했다. 종교 화합의 탄력성, 사회적 책임까지 소중한 문화 밑천이다. 그런 유산을 확인했던 계기가 어제 교황장이었다. 갈라졌던 이 사회에 통합과 일치를 만들어냈으니 이적(異蹟)에 가깝다. 소설가 박완서가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했던 말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추기경님께서는 부끄럽게도 당신은 신비 체험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걸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분 생애를 통해 중대한 고비마다 선택한 길, 내린 결단이 곧 하느님의 음성이었다는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거꾸로 가는 듯하다가도 이 나라는 발전해왔고 가난에서 벗어났고 식민지에서 벗어났고 전쟁을 이겨냈다. 진통기마다 그분은 현장 한 가운데 계셨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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