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원칙'있는 정부지원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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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기아사태가 한달을 맞았다.

기아 자체의 해결도 중요한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제일은행을 비롯한 채권 금융기관의 국제신용도 급락에서 생기는 일종의 신용위기다.

이는 한 개별기업의 차원을 넘어 국가경제차원의 국제적 신인도 (信認度) 와 관계되는 문제다.

때문에 정부도 시중은행에 대한 특융 (特融) 이야말로 최후에나 쓸 수 있는 카드라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국회동의라는 요식을 갖추면 개입가능하다는 식으로 자세를 바꾸는 분위기다.

정부의 이같은 입장선회는 최근의 동남아 통화위기를 감안할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정부가 은행의 해외차입시 지급보증을 하든가, 혹은 한은을 통해 특융을 하는 형태로 시장경제에 개입하려면 원칙이 분명해야 한다.

이는 사후에 비슷한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고 당면한 사태의 해결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우선 별로 상황이 분명치 않은데도 외국의 신용평가기관이 우리 금융기관의 등급을 낮춘 것이 바로 긴급한 신용질서의 위기로 연결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사태가 정말 급하게 진행되기 전에 적절한 개입시기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논리에 따라 2조~3조원의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부작용을 감안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다.

외국이 한국경제의 장래를 불안하게 보는 것도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다.

밖에서 보기에 우리가 이번 대기업 연쇄부도를 거품빼는 기회로 삼아 경제원칙에 맞게 대처해 나가면 장기적으로 훨씬 건강한 경제가 될 것으로 비친다는 시각도 필요하다. 그러려면 기아나 제일은행 등 금융기관이 정부지원을 기대하는 모습보다는 자기책임아래 생존노력을 지금보다 훨씬 강도높게 진행시키는 것이 원칙이다.

현실적으로도 아무리 정부가 국회에 공을 넘기려 해도 국회도 사후책임이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특융같은 지원에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경우 기아에 요구한 것 이상의 채권은행 스스로의 자구노력이 지원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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