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이 몰고 올 사회불안, 테러보다 위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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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지구촌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문 닫는 기업이 속출하면서 실업자가 급속도로 늘고 있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정부에 대책을 내놓으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영국 일간지 타임스 등 외신들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불과 6개월 전 오일 달러가 넘쳐 콧노래를 부르던 러시아에서는 절대 권력으로 여겨졌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 반대 시위도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일자리를 잃은 농민공들이 정부에 생계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파업이 발생했고, 라트비아·칠레·그리스·불가리아·태국에서도 실직자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경제위기 타격이 큰 아이슬란드에서는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확산돼 연정이 무너지는 사태로 번졌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도 불안하다. 데니스 블레어 미 국가정보국장은 12일 상원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경제위기로 인한 사회 불안정이 테러 위협보다 더 심각하게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에 따르면 경기 침체로 세계의 일자리는 올 연말까지 5000만 개가 사라질 전망이다


◆장기화 땐 큰 위협=더 큰 문제는 이런 불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어느 정도까지 침체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대규모 소요나 폭동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블레어 국장은 “이런 경제위기가 1~2년 정도 지속된다면 국가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리스크가 커진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정치 컨설팅 업체 유라시아 그룹을 이끌고 있는 데이비드 고든도 “침체가 장기화되면 각국이 위기를 이겨내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고든은 “많은 국가가 적정한 기간의 경기 침체는 정치적 어려움 없이 극복해낼 수 있겠지만 침체 기간이 길어지면 모든 대책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경고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려운 시기에 큰 전쟁이 뒤따랐다는 사실도 불안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은 18일 대공황 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우려를 전했다.

◆탈출구는 없나=위기의 진원지이자 세계 최대 경제대국인 미국에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 상원 외교위원장인 존 케리(민주·매사추세츠) 의원은 지난주 각계 전문가들을 초청해 미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전문가들은 “어려움에 처한 미국 은행들을 일시적으로라도 국유화해야 한다”는 답까지 내놓았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 했던 중앙통제 방식의 경제 운용을 제안한 것이다. 이는 자유시장경제라는 미국의 경제운용 원칙에 반하는 것이어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지만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전문가들은 또 미국이 보호주의를 배격하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구제금융안에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조항을 삽입시킨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들은 그러면서 “각국이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선 공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보수성향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데스몬드 래치먼은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위기에 대처하는 국가 간 경제정책 공조가 되지 않고 있다”며 “이런 식이라면 이웃나라를 거지로 만들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고 꼬집었다.

박경덕·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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