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지하를 모른다? 당신은 진짜 연극팬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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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적이면서도 퇴폐적인 22세인가 싶으면, 폭발적인 에너지의 중년 여성으로 변신하는 연극 배우 이지하씨. 실제로는 수줍음을 타고 말을 아끼는 성격이다. 무대 위의 강렬함은 그가 연극 무대만을 고집하면서 천천히 발견한 또다른 내면이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배우 이지하(39)씨를 아는지. 안다면, 당신은 연극을 보는 사람이다. 모른다면, 연극과 아예 담을 쌓거나 혹 보더라도 연예인이 출연해야 보는 관객이다.

이런 기준점을 제시할 만큼 이지하란 배우가 대단한가. 그의 최근 활약상을 보면 무리가 아니다.

그는 지난해 연말 한 인터넷 예매 사이트가 선정한 ‘최고의 티켓 파워’에서 연극 부문 여자배우상을 수상했다. ‘오레스테스’ ‘침향’ ‘민들레 바람되어’ 등 최근 출연작마다 화제를 모았다. 영화·드라마·CF엔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은 채 연극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뚜렷이 각인시키는 배우. 요즘 대학로는 그야말로 ‘이지하 대세’다.

◆데뷔 16년만에 첫 주연?=이지하씨는 현재 대학로 문화공간 이다에서 공연 중인 연극 ‘억울한 여자’에 출연 중이다. “저 대부분 조연만 했어요. 원톱으로 작품을 이끈 건 이번 작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에요.”

이게 무슨 소리? 근데 영 틀린 얘기가 아니다. 물론 주연을 해보긴 했다. 1993년 데뷔작 ‘바보 각시’에서다. 연극판을 떠났다 복귀했던 97년 ‘종로 고양이’에서도 주연은 했다. 그러나 그때는 연극이 뭔지 전혀 감을 못 잡은 채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그냥 했다. 배우로서 경험을 쌓고 자신의 역량을 키워가며 무대를 알고난 뒤 주연을 맡기는 이번 작품이 처음인 셈이다.

이런 이지하씨가 어떻게 매 작품마다 눈에 띄었을까. 개성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야구 경기로 치면 4번 타자는 아니지만 팀에 꼭 필요한 키플레이어라고 할까.

그에게 서울연극제 신인연기상을 안겨준 2005년 작 ‘그린 벤치’에서는 몽환적이면서도 퇴폐적이었다. “극중 배역처럼 실제도 22살인 줄 알았다”란 게 한 연극평론가의 평이었다. 2007년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게 해준 ‘오레스테스’에선 강렬하고 폭발적이었다. 지금 공연 중인 ‘억울한 여자’에선 “우리 언제 소주 한잔 하자”란 겉치레 인사말도 “왜 소주 안해요?”라고 항의하는, 사회성 빵점인 여성을 연기하고 있다.

“제가 배역을 택하는 기준은 결핍이에요. 뭔가 부족하고 그래서 채워주고 싶은 사람…, 인간은 누구나 그런 면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가 정말 억울하듯이 반문했다.

◆과도한 낯가림, 무대에서 분출하다=이지하씨는 내성적이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묻는 말에만 또박또박, 그것도 아주 정색하고 대답했다. “그래도 연극해서 많이 인간이 된 거예요.”

그는 부산에서 쭉 자랐다. 어릴 때부터 조숙했단다. 친구들과 노는 덴 관심 없었다. 책을 보고 혼자 연극을 보러 다녔다. 그러다 중학생 때 우연히 연극을 해봤다. 너무 좋았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수줍음이 많은 애가 어떻게…”라며 깜짝 놀랐다. 그게 중·고시절 유일한 무대 경험이었다.

그걸 다시 느끼고 싶어 경성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졸업하자마자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갔다. 미친 듯 무대에 빨려들어가는 게 무서워 4년간 광고·이벤트·제과 회사 등에서 경리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 반복되는 일상에 숨이 막혀 다시 연극판을 찾아 현재까지 달렸다.

“전 배우란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현실에서 만족감이 없으니 무대에서 달라진 나를 표현하고 싶은 절박함이랄까.”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근데 언제부턴가 무대란 가리고 싶지만 그럴수록 더욱 도드라지는 ‘나’란 생각이 들어요.”

이씨 낯빛이 조금 붉어졌다. 그는 공연 세시간 전엔 꼭 극장에 와야 맘이 놓인단다. 결벽에 가까운 완벽주의, 진폭이 심한 감정기복, 유머감각이란 모르는 지나친 진지함까지. 어쩌면 평범하게 생긴 일상인 ‘이지하’가 이토록 강렬한 배우 ‘이지하’로 변신할 수 있는 건 자기와 대면하는 시간이 오래오래 농축됐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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