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가벌]12. 필리핀 마르코스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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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마르코스가는 필리핀 현대사에 영욕 (榮辱) 의 깊은 주름을 남기고 이젠 역사속으로 사라져 가는 정치가문이다.

지난 65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오른뒤 20여년 동안 필리핀 국민들의착취와 고통을 볼모로 누려온 이 가문의 영화는 결국 86년 민중봉기에 따른 일가의해외도피라는 종말로 막을 내렸다.

마르코스 족벌정치의 잉태시점은 지난 54년 북부 루손섬의 명문가 출신 마르코스와 중부지역 정치명가 로무알데스가의 후손 이멜다의 결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통령의 야심을 키우고 있었던 당시 36세의 최연소 상원의원 마르코스는 두터운 정치적 배경과 재색을 겸비한 이멜다와의 결혼을 발판으로 정치입지를 급속히 강화, 결국 65년 대통령의 꿈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마르코스의 대통령 당선은 두 가문에는 영화의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필리핀 국민들에게는 고난의 출발이었다.

69년 재선에 성공한 마르코스는 공산세력의 준동과 경제불안등을 이유로 72년 계엄을 선포함으로써 장기독재의 발판을 마련했고 그후 8년여의 계엄연장과 무려 5번에걸친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 체제를 굳혀 나갔다.

76년 내각제 개헌을 통과시킨 마르코스는 대통령에 총리까지 겸함으로써 절대권좌에올랐고 이멜다는 수도 마닐라시장과 주택건설부장관을 겸하는 실질적인 2인자로 국정전반을 좌지우지했다.

뿐만아니라 장남 마르코스 2세는 22세의 나이에 일로코스 주지사에 무투표 당선됐고 장녀 이메도 20대 후반에 1천만 회원을 거느린 정치단체 전국청년연맹 총재를 맡는등 직계가족들이 모두 권력핵심부에 포진했다.

정권붕괴 당시 군참모총장 파비안 베르는 마르코스의 사촌동생이었고 이멜다의 사촌오빠 다니엘 로무알데스는 상원의장을 맡는등 마르코스 정권 전성기 군.관.경찰 고위간부의 80%이상과 정.재계의 요직 대부분을 대통령 친인척이나 고향출신 인사들이 차지했을 정도다.

마르코스는 또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른바 '측근 (크로니) 자본주의' 라는 특유의 재벌체제를 만들어냈다.

자신을 거역하는 재벌들을 탄압하는 한편 정치자금 헌납에 솔선하는 측근들에게는 막대한 특혜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필리핀 재계의 판도를 바꾸어 버리는 과정이었다.

마르코스의 기업착취 수법은 공공사업과 관련, 커미션을 챙길때 전체 사업규모의 15%를 공공연히 요구했다해서 그에게 부쳐진 '미스터 15%' 라는 별명에서도 엿볼 수있다.

지난 86년 마르코스 정권 붕괴직후 필리핀 당국의 조사발표에 의하면 마르코스 일가가 해외로 빼돌린 부정축재 금액은 당시 필리핀의 외채규모와 맞먹는 1백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83년 최대 정적이었던 아키노 상원의원 암살사건을 결정적인 고비로 마르코스에 등을 돌린 민심은 결국 86년 2월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렸고 성난 군중에 쫓긴 마르코스일가는 하와이로 기약없는 망명길을 떠나야 했다.

망명후에도 마르코스는 권력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국내 잔류세력들을 동원, 수차례에 걸쳐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89년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객지에서 최후를 맞았다.

지난 91년 이멜다와 자녀들은 아키노정부의 허가로 망명 5년만에 고국땅에 발을 디뎠으나 마르코스의 유해는 필리핀 국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그로부터 2년후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귀국후 이멜다는 92년 대선에 출마, 남편을 대신해 다시 한번 정권욕을 불태우기도했으나 낙선했다.

94년 고향 레이테섬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그녀는 현재 톨로사시의 태평양이 내려다 보이는 대저택에서 정치활동보다는 주로 취미생활로 소일하며 말년을 보내고 있다.

장남 마르코스 2세도 귀국후 아버지의 고향인 일로코스주에서 하원의원에 당선했으나95년 상원의원 선거에 패한후 칩거중이다.

마르코스의 두딸중 장녀 이메는 무역업을 하는 남편을 따라 싱가포르에서 살고 있으며 차녀 이레네는 마닐라에서 남편과 함께 개인사업을 하는등 두사람 모두 정치에는 간여치 않고 있다.

임봉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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