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2004년 경질됐다 2인자로 화려한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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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택(63·사진) 북한 노동당 행정부장에 서방 정보기관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매제인 그는 지난해 여름 김 위원장의 와병 이후 ‘포스트 김정일’의 향방을 쥐고 있는 인물로 급부상했다. 북한의 차기 정권이 김 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을 형식적인 국가원수로 추대하되 실제로는 장성택이 권력을 잡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외신 보도와 정보 분석도 잇따르고 있다.

북한 매체를 통해 파악되는 그의 행보도 심상치 않다. 공개 활동을 재개한 김 위원장의 곁에는 늘 그가 서 있다. 김 위원장을 멀찍이 떨어져 수행하거나 단체사진 촬영 대열에도 끼지 않았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2인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굳힌 것은 물론 김 위원장의 와병 기간 위임통치를 했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그가 2006년 행정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에 임명된 뒤 전담해 왔던 평양 현대화 사업을 놓고 올해 북한 신년공동사설은 “혁명의 수도 평양시가 더욱 훌륭히 꾸려졌다”고 평가했다. 2004년 경질됐다 복귀한 그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각종 기록과 증언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장 부장의 개인사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 재학 시절부터다. 김 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인 이한영(사망)은 “장성택은 손풍금(아코디언) 연주가 일품이며, 성품이 온화한 장 부장에게 김경희(김정일 위원장의 여동생)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다”고 소개했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하지만 김일성 전 주석의 반대에 부닥쳤다. 결국 장성택은 원산경제대학으로 전학을 가야 했다. 김경희는 김 주석의 마음을 돌리려 하소연도 하고 직접 벤츠를 몰고 원산으로 찾아가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김경희가 몸져눕자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나섰다. 2003년 일본에서 출간된 『김정일 입문』에는 “당시 선전선동부에서 문화예술을 담당하던 김정일이 영화 제작을 핑계로 장성택을 직접 만나 보고 인간 됨됨이가 괜찮다는 보고를 김일성에게 올려 결혼이 성사됐다”고 쓰여 있다. 이후 장 부장은 평양시 당위원회 지도원을 시작으로 당 청소년사업부 부장(1988년), 청년 및 3대혁명소조부장(89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95년), 당 근로단체부 및 수도건설위원회 제1부부장을 거쳐 2007년 당 행정부장에 올랐다. 경력만으로 보면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좌천을 시작으로 그의 장밋빛 인생 중간에는 수차례의 굴곡도 있었다. 90년대 중반에도 사생활 문제로 당에서 운영하는 협동농장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 고위 간부의 호화 결혼식 사건이 조사 중이던 2004년에도 조직지도부 내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고 외화 벌이 사업을 했다는 이유로 자리를 내놨다. 일종의 모반으로 여겨질 만한 사건이었음에도 2006년 장 부장이 복귀한 것을 보면 그에 대한 김 위원장의 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환갑이던 2006년엔 외동딸이 프랑스에서 자살하는 아픔과 작은형의 사망을 겪었다.

두 차례의 정상회담 때 그를 직접 목격한 한 인사는 “장 부장이 과거에 비해 많이 움츠러든 채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며 “그러면서도 남측 기업인들이 실세인 장 부장을 알아보고 줄줄이 찾아가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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