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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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식사를 하는 동안 하영은 아주 여러 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에 사뭇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좋아요" 라는 말을 몇번씩이나 되풀이했고, 좋다는 생각에 스스로 도취한 듯 느닷없이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이야기는 저절로 부풀어 구체적인 여행지가 거론되고, 여행 기간이 설정되고, 패션숍에 관계된 일을 처리하는 방법까지 상정되었다.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다" 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매번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표정을 짓곤 했던 것이다.

그러지 뭐, 그래, 괜찮아. 하영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나는 거의 매번 그런 식의 대답을 건네며 머리를 끄덕이곤 했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녀가 주변 환경과 자신의 현재 상태에 스스럼없이 심취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로 여행 계획을 세우고, 말로 여행을 떠나고, 말로 여행지에 당도하고, 말로 여행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나쁠 게 뭐란 말인가.

그녀의 바쁜 나날이 실제로는 여행을 떠날 수 없게 한다는 걸 나는 훤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그와 같은 가상 여행에 더욱 충실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의 가상여행에 망설임없이 동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의 생일 여행이 온전하게 마무리 되도록 심정적으로 도와 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 영혼을 송두리째 퍼부을 수 없는 제한된 사랑의 한계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하세요?" 식사를 끝내고 레스토랑 아래쪽의 저수지로 내려갔을 때 그녀는 어느덧 가상 여행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저수지 주변에 마련된 녹색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을 때 던져진 그녀의 질문, 나른한 하오의 햇살이 뒤덮인 수면처럼 이를데 없이 잠잠한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그걸 여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 " 저수지 수면에다 시선을 붙박은 채 나는 중얼거렸다.

"이런 질문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정말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을 건가요?" "소설이라니… 이런 자리에서 그런 얘기는 왜 꺼내?" 고개를 돌리자 벤치 뒤편의 떡갈나무에서 흘러내린 그늘이 그녀의 얼굴을 반쯤 뒤덮고 있었다.

"그건… 소설을 쓰지 않는다는 게 저와의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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