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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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가슴 저린 봄날. 정오에 나는 명동성당 입구에서 하영을 만났다.

그리고는 인근의 유료 주차장으로 그녀와 함께 가 입구에 세워둔 차에 올랐다.

허리선을 잘 살려 주는 지퍼 달린 검정 재킷에 일자형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어서인가, 나의 안목으로는 그녀가 도무지 서른셋으로 보이지 않았다.

서른셋은 커녕, 뭔가를 은근히 도발하고 싶어하는 이십대 중반 정도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아침에 보내주신 장미, 정말 고마워요. 지난 밤에는 늦도록 잠이 오질 않아서 우울한 기분으로 와인까지 몇 잔 마셨는데… 아침에 장미를 받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어요. 상쾌한 소리를 내며 유리잔이 깨지는 듯한 느낌, 아시겠어요?" 핸들을 잡은 나의 손등에다 자신의 손을 얹으며 그녀는 물었다.

"근데, 왠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 바로 앞에서 서행하는 연두빛 스포츠카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나는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죠, 그게?" 나의 손등에 얹었던 손을 거두며 그녀가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서른 세 송이의 장미 말인데… 아무래도 너무 많이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게 잘못된 것 같다는 거지. " "그럼 몇 송이가 적당할 것 같애요?" 낭랑하게 고조된 음성으로 그녀가 다시 물었다.

"스물여섯 송이. " "푸, 생일이라고 정치적인 발언하시는 거죠?" "아니 진심이야. 그래서 지금 생일을 축하하는 독자적인 방법을 구상하는 중이야. "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며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예를 들자면?" "그런 거, 예를 들 필요는 없어. 주관적으로 행동하면 그만이니까. 오늘 내가 서른 세 송이의 장미를 보낸 건 법적인 나이와 생일을 형식적으로 축하한 거야.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그게 석연찮다는 건데… 아무렇든 내년부터는 철저하게 주관적으로 축하를 해 줄게. " 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를 듣고 나는 재빨리 차를 출발시켰다.

"주관적인 축하라면… 제 나이를 맘대로 재단하겠다는 건가요?" "법적인 나이를 형식적으로 축하하는 게 아니라 인생살이가 반영된 실제의 모습을 근거로 나이를 측정하고 거기에 걸맞게 축하를 해 주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일년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해마다 축하받는 나이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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