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한국은행 특별융자 - 반대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급박한 신용위기에 의해 경제가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을 때 중앙은행은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특융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제일은행의 경영난은 경제질서가 마비될 정도의 불안을 초래할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

제일은행의 경우 한보.삼미등 거래기업들의 부도에 따라 대손충당금 적립부담이 3천7백억원 정도 증가했다.

이로 인해 상반기중 당기순이익은 3천5백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렇지만 같은 기간 1천1백40억원의 업무이익 흑자를 내는 등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위기를 제기하며 한은특융을 신청한 것은 적자를 국민에게 떠넘기려는 무책임한 처사다.

제일은행은 경영난이 심해질 경우 국제 금융시장에서 신인도가 떨어지고 국내 금융시장의 불안을 가중시킬 것이므로 한은특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은특융이 궁극적으로 국민경제의 불안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데서 오는 오류다.

수조원에 이르는 특융을 제공할 때 물가불안이 필연적으로 발생해 국민에게 무차별적인 고통을 안긴다.

중앙은행의 특융이 시중 금융기관들의 경영위기가 올 때마다 제공되면 경제불안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제일은행에 대한 한은특융이 거론되자 서울은행과 종금사 등 경영난에 처한 다른 금융기관들이 경쟁적으로 한은특융 신청을 검토하고 있다.

더구나 한은특융은 금융기관들의 도덕적 해이를 가져와 금융기관의 부실을 양산하면서 금융산업과 국민경제를 함께 부실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 경제에 대한 국제신인도 하락은 차원을 달리하는 심각한 상황이 된다.

또한 한은특융은 특정 금융기관에 대한 명백한 특혜다.

따라서 국제 무역분쟁을 유발하며 국제거래상 갖가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금융기관의 부실화는 원칙적으로 개별 금융기관 책임아래 해결돼야 한다.

경영난에 처할 때 금융기관은 경비절감이나 인원.조직감축 등의 자구노력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난이 계속 심화돼 정상업무가 어려워질 때 금융기관은 매각, 예금양도 또는 청산 등의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수순이다.

중앙은행은 통화신용정책의 수행상 금융시장 여건에 따라 통화량을 조절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현재 금융시장의 여건과 국제신인도를 감안해 시장유동성을 제고하기 위한 정책수행은 가능하다.

현상황에서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이 부실상태에 빠진데 대한 원인과 책임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재발방지를 위한 근원적 대책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금융기관의 부실은 관치 (官治) 금융에 근본적 원인이 있음을 감안할 때 이를 척결하기 위한 개혁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융개혁안은 재검토돼야 한다.

정부안은 한국은행에서 은행감독원을 떼어내고 총리실 산하에 은행.증권.보험감독을 총괄하는 금융감독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와같이 될 경우 정부는 일반 금융기관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해 권력형 비리를 쉽게 주도하고 중앙은행은 뒤치다꺼리로 특융을 제공하기 위해 발권력 (發券力) 을 남용하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

금융감독제도를 현행대로 유지하면서 중앙은행과 증권감독원 및 보험감독원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각급 금융기관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이 올바른 금융개혁의 방향일 것이다.

[이필상 고려대 경제학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