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톡쏘기]5.인간아,그냥 살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저는 쌍계사 밑, 화개천에서 사람의 눈을 피해 사는 수달이지요. 이렇게 저의 본거지를 밝히는 데는 정말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지요. 우리 수컷들의 생식기가 정력에 좋다고 우리를 포획하고자 방방곡곡의 한심한 인간들이 야수처럼 달려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가족 회의를 거듭하였지요. 당당하게 우리의 입장을 밝히자, 그냥 숨어 살자 하는 등등 아버지 수달과 어머니 수달 간에 격론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지요. 우리들의 목숨이 무도한 인간들의 손에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중대사였으니까요. "무자비한 인간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 "가족들이 소리.소문 없이 죽는 것보다는 인간들에게 호소하여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는게 먼 장래를 위해서는 좋을 것이오. " 가족 회의의 결론은 본거지를 밝히고 선언문을 공표하자는 쪽이었지요. 더욱이 인간 역시 태어날 때는 무자비한 중생이 아니었으며, 지금도 가슴 속에는 불성 (佛性) 이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를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오지요. "혜통 (惠通) 은 출가하기 전, 서라벌 남산의 서쪽 은천 골짜기 어귀에 살았다.

하루는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한 마리의 수달을 잡아 고기는 해먹고 그 뼈를 동산에 버렸다.

이튿날 아침 살펴보니 동산에 버린 그 뼈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그는 핏방울이 떨어진 자취를 따라 찾아가 보았다.

수달의 뼈는 전에 살던 굴로 되돌아가 낳은지 얼마 안된 다섯 마리의 새끼를 안고 있었다.

그는 이 광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짐승의 지극한 모성애에 감동한 나머지 자기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문득 세상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선한 성품을 믿고 선언문을 당당하게 밝히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후손들이 물 맑은 화개천에서 자자손손 평화롭게 살기를 갈망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우리 수달이 살기에 화개천만큼 좋은 명당도 없을 것입니다.

장마가 지면 섬진강은 탁류로 돌변해 흐르지만, 화개천은 진달래 꽃물이 들 무렵부터 지리산 단풍 위에 무서리가 내릴 때까지 일년 내내 하루도 물이 흐려지는 법이 없지요. 게다가 이곳은 손바닥만한 붕어나 메기 등 먹거리가 풍부하고, 겨울에는 노을처럼 하늘을 뒤덮는 되새떼가 장관을 이루지요. 뿐만 아닙니다.

화개장터에 경상도.전라도 사람들이 모여 오순도순 나누는 정다운 얘기들, 하루의 날빛이 접혀갈 때쯤 쌍계사에서 들려오는 법고 소리나 운판 (雲版) 두드리는 소리, 목어 (木魚)치는 소리와 범종 소리 등을 어디에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목어 치는 소리는 우리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우리들의 먹거리가 된 물고기들이 내생에는 비늘 없는 몸으로 환생하라는 스님들의 염원이랍니다.

우리 수달들의 삶터를 그만 자랑하고, 도대체 선언문이 무언지 어서 공개해보라구요? 웃지는 마십시오. 또한 우리를 동정하려고도 마십시오. '수달 위에 사람 없고, 수달 밑에 사람 없다.

' 한마디만 더 군소리를 하지요. 우리 수달들은 '멸종의 위기' 운운하면서 동물 보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굳이 우리 수달을 보호하려 들지 말고 인간이 '살려고 하는 생명' 인 것처럼 우리 수달 역시도 그러하니 생명을 서로 존중하라는 것이지요.

정찬주 (소설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