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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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그녀의 깜찍한 발상에 나도 모르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첫사랑' 이라는 소설을 중단했더니 '첫사랑' 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새로운 길로 열린다? 그녀의 논리적 비약에서 반짝이는 재기를 느끼며 나는 무선전화기를 다른 손으로 바꿔들고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발코니 쪽으로 걸어가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걸어온 전화를 이렇게 은근슬쩍 공적인 전화로 바꾸는 것…… 이런 것도 자연스럽게 열리는 또다른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예린씨는 의도적으로 길을 만들고 있는 거고, 나는 이미 그것을 눈치챘으니까 이것은 파울 플레이…… 다시말해 교묘한 반칙 행위가 되는 거요. " "흠, 선생님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분이시군요. 하지만 그것이 선생님에게 열리는 또다른 길일 거라는 제 소신에는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거예요. 그리고 오늘은 제가 뜻한 만큼의 성과를 얻었으니 이만 끊을게요. 그럼, 편안한 밤 보내세요. "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발코니로 나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던 한낮과 달리, 녹색 테이블은 이제 검푸른 어둠의 식탁으로 변해 은밀한 밤의 제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봄밤의 저쪽, 강 건너편의 불빛은 이미 제전의 절정을 예고하듯 한강의 수면으로까지 흘러내려 화려한 춤사위를 뽐내고 있었다.

절정이란, 꺼지기 직전의 성냥불처럼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것.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오월의 첫날이 막을 내리는 밤풍경을 잠잠한 눈빛으로 지켜보며 나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무엇인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떤 기류가 서서히 그 조짐을 드러내기 위해 은밀한 태동을 시작한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의 시간. 밤이 숨기고 있는 흑막의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에너지로 무엇인가가 연해 감지되는 것 같아 나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워물었다.

느끼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은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다, 하고 나의 몸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진동은 좀체 잦아들지 않았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의 암층에서 시작돼 현실의 중심을 관통하는 것 같았고, 이윽고는 예비된 미래로까지 그 파장을 면면히 이어나가려는 것 같았다.

인간의 삶이 단지 생명의 시작과 끝 사이를 지나가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는 것, 그리하여 시간과 시간의 매듭과 연결고리 사이에 은밀한 필연이 숨겨져 있다는 걸 그것은 오래오래 일깨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꼼짝없이, 나는 포박당한 사람처럼 진동의 와중에 몸을 맡기고 전혀 다른 종말감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라, 그리고 내 운명을 옥죄는 이 사슬을 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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