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이회창 관계 … 신뢰- 갈등 교차한 애증의 5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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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권력의 이동에는 미묘한 역사가 있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과 이회창 (李會昌) 후보의 관계도 그런 구석을 찾을 수 있다.

현재의 권력자는 후임자를 만들어줬다는 연출자 의식에 젖게 마련이고, 후임자는 자기 힘이었다는 쟁취의 믿음을 갖는다.

87년 '민정당 후보 노태우 (盧泰愚)' 는 전두환 (全斗煥) 대통령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盧후보는 "무수한 견제를 뚫은 인고 (忍苦) 의 승리" 라고 생각했다.

92년 김영삼대표는 후보가 되기까지를 자신의 능력에 의한 돌파와 장악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盧대통령은 박태준 (朴泰俊).이종찬 (李鍾贊) 씨의 야심을 꺾어준 것은 통치력이었다고 서운해했다.

지금 金대통령과 李후보는 어떤 생각을 가질까. 李후보는 金대통령의 '의외의 선택' 속에서 늘 등장했다. 93년 현정권 출범 당시 대법관이었던 李후보의 감사원장 기용은 개혁의 질풍노도를 예고한 것이었다.

그해 12월 국무총리로 발탁한 것은 뜻밖이었다. 일각에는 '감사원장 이회창' 을 金대통령이 감당할 수 없어 국무총리로 앉혔다는 관측이 있었다.

李후보는 총리재임 4개월쯤 통일안보조정회의 운영문제를 놓고 金대통령과 충돌했다. 대통령 고유권한에 대해 헌법상 총리의 역할을 내세운 李후보가 金대통령으로선 통치권에 도전하는 거북한 존재였다. 그는 국민들에게 '대쪽 소신' 의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지만 金대통령과 결별하는 듯했다.

그런데 1년9개월뒤 96년 4.11총선을 앞두고 金대통령은 李후보를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으로 영입, 놀라움을 주었다. 그를 끌어들이는 설득 과정을 통해 두사람의 관계는 '믿음' 으로 돌아선 듯했다.

총선 승리후 金대통령은 대선논의 금지령을 내세워 李후보의 정치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이회창 불가론 (不可論)' 은 집권 민주계의 신념으로 굳어지는 듯했다. 李후보는 실질 경선론으로 맞서는 자세를 취하면서 긴장관계가 됐다.

한보와 김현철 (金賢哲) 씨 사건은 金대통령에게 李후보를 다시 찾게 했다.

3월13일 예상을 깨고 그를 대표로 임명한 것은 또한번 의표를 찌른 것이었다. 청와대는 李후보가 金대통령의 선택으로 성장했음을 지적한다.

승리의 원동력인 대세론은 金대통령이 그를 대표로 임명해줌으로써 본격 형성됐다는 것이다.

고위 관계자는 "모든 경선주자들이 비슷한 실력을 보이는 속에 대표직함은 결정적 위력을 발휘한 것" 이라고 설명했다. 金대통령의 중립자세 덕분으로 대표의 프리미엄이 효력을 발휘했음을 은근히 강조한다.

그러나 李후보진영은 개척의 신념을 갖고 있다.

李후보쪽의 한 참모는 "金대통령의 당초 속마음은 李후보와 거리가 있었다. 대세론의 위력에 눌려 나타나지 못했을 뿐" 이라고 주장했다.

대표 임명도 민심이반 상황에서 李후보의 '법대로' 이미지에 의존하려는 불가피한 도피였다는 시각도 나타낸다.

두사람의 관계는 '신뢰가 깔렸다' 고 하기에는 서로 개성이 강하고, '갈등이 강했다' 고 단정하기엔 한사람은 통치권자여서 적절치 않다.

권력세계의 독특한 애증 (愛憎) 이라고 할 만하다.

이제까지의 과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두사람의 관계는 새롭게 형성될 것이다.

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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