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미저리라는 말을 듣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나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작년에 겪은 일들 때문에 아직도 감정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그럴 거요.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며 삐걱거린다고나 할까……암튼 그런 형국이요. " "삐걱거린다는 표현이 무척 아프게 들리네요. 삐걱거린다는 건……뭔가 몰락의 조짐을 느끼게 하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불길한 아픔이 느껴져요. 소설을 쓰지 않으면……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실 생각인가요?" "근데 이예린씨는 나이가 몇이요?" 나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연민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아 문득 떠올린 궁금증이었다.

"전, 스물넷요. " "스물넷인데……피디란 말이요?" 대학 졸업하고 곧바로 방송사에 입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프로듀서가 된 고등학교 동창생 하나가 문득 떠올라 나는 놀라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시절과 달리 요즘 피디들은 전반적으로 상당히 젊어요. 하지만 전 수습기간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았어요. 첫 발령을 특집제작국으로 받아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제가 뜻한 일을 하게 되었으니 열심히 해 볼 참이예요. 아침에 말씀드렸던 그 다큐멘터리가 바로 제가 연출하게 된 첫 작품인데……이렇게 초반부터 어려움이 많네요. 하지만 뭐 사적으로 전화를 드린 거니까 오늘은 더이상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께요. 근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실지에 대해서는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죠?" "아, 그건……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명예 퇴직한 다음날부터 곧바로 다른 일에 몰두하기 어렵듯, 매사에는 나름대로 정리해야 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죠. 그래서 지금은 지극히 단조롭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어떤 쪽으로든 길이 열리겠죠 뭐. " "스스로 길을 만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길이 열리길 기다린다……그런 말씀이로군요. " 음미하듯 그녀는 느린 어조로 내 말을 정리했다.

"그렇죠, 자연스럽게. " "그럼 혹시……제가 첫 작품으로 연출하게 된 다큐멘터리가 선생님에게 자연스럽게 열리고 있는 또다른 길은 아닐까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