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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 태우기 끝날 무렵 역풍 … 화염 휩싸여 사망, 절벽 추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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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9일 오후 6시20분 경남 창녕군 화왕산성(해발 757m). 정월 대보름을 맞아 열린 ‘억새 태우기 행사’를 보던 2만여 명의 관람객은 보름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풍년 농사와 안녕을 기원하는 상원제(上元祭)를 시작으로 달이 뜨자 하늘을 진동하는 북소리와 함께 대형 달집과 18만5100㎡의 억새밭 곳곳에서 불이 붙기 시작했다. 풍물놀이패들의 흥겨운 농악놀이도 시작됐다.

행사장 가운데 볏짚으로 쌓아 올린 대형 달집에 불이 타오르면서 억새밭도 검붉은 화염을 토해내며 50m 높이로 타올랐다. 20여 분 만에 불길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관람객이 대형 달집 앞에서 손을 비비며 간절한 소원을 비는 모습도 보였다.

이때 갑자기 역풍이 불면서 동쪽으로 향하던 불길이 서쪽으로 바뀌면서 불길이 드세졌다. 너비 20∼50여m의 방화선도 소용이 없었다. 방화선을 넘어 온 불길이 배바위 절벽 위에 있던 50여 명의 관람객을 덮쳤다. 불길을 피해 뒷걸음치던 4명은 불길에 휩싸인 채 숨졌다. 나머지는 배바위 절벽 10여m 아래로 떨어져 크게 다쳤다. 숨진 사람은 남자 한 명, 여자 세 명이었다. 사망자들은 화상을 입은 채 떨어져 신원 확인에 시간이 걸리고 있다. 부상자 50명 중 34명은 창녕·마산·부산 지역 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다. 부상자 대부분은 2~3도의 화상을 입었으며, 일부는 생명이 위독하다. 이날 불은 오후 9시11분쯤 완전히 진화됐다. 경찰은 10일 5개 중대 400명을 동원해 실종자 수색에 나설 예정이다.

◆2만여 시민 산성에 몰려=산성에는 축제를 보려는 관광객과 등산객 등 2만여 명이 오후 4시쯤부터 일찌감치 올라와 모여 있었다. 행사를 주최한 창녕군은 낮 12시부터 소원풀이 짚단을 팔고 패러글라이딩 축하 비행, 연날리기 등 식전행사를 펼치며 관람객을 모았다.

주최 측은 산불 예방을 위해 2.6㎞ 둘레의 화왕산성 주변에 방화선을 만들고, 등짐 소화장비를 갖춘 수십 명만 배치했을 뿐 만약의 사고에 대비하지 못했다.

당초 억새 태우기는 오후 5시30분에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행사 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관람객의 항의를 받다가 6시10분쯤 불을 붙였다. 목격자들은 “예정대로 행사를 했으면 역풍을 만나지 않아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가자 2만여 명이 불길을 피하기 위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부상자들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정확한 사고 경위를 파악 중이다. 또 창녕군과 행사를 주관한 산악회 등을 상대로 안전 대책을 제대로 세웠는지도 조사하고 있다.

◆재앙 쫓기 위한 억새 태우기=1995년 시작된 화왕산 억새풀 태우기는 올해 여섯 번째다. 화왕산의 이름이 ‘큰 불 뫼’에서 온 것처럼 화왕산에 불기운이 들어와야 풍년이 들고 재앙이 물러간다는 설에 따라 시작됐다. 초기에는 해마다 하다가 환경오염을 우려해 3년 주기로 열고 있다. 올해는 여섯 번째다.

창녕=김상진 기자

◆화왕산=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에 있는 높이 757m의 산이다. 지금 있는 3개의 못은 화산의 분화구였다. 이 못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창녕 조(曺)씨의 득성비가 있고 정상부 둘레(2600m)에는 화왕산성(사적 64호)이 있다. 산성 안에는 잡목 없는 억새밭이 18만5100㎡(5만6000여 평)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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